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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내 기타는 잠들지 않는다 6. 전쟁의 비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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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중공군의 인해전술로 1.4후퇴가 시작되자 남쪽으로 향하는 피난민 행렬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 인민군 패잔병들이 아군의 눈을 피해 산길을 걸어 북으로 올라갔다. 머리가 깨지고 다리를 저는, 말 그대로 패잔병이었다.

마을은 한동안 조용했다. 그러다 머리에 짐을 이고 등에 아이를 업은 피난 행렬이 잔뜩 북쪽에서 밀려왔다. 1951년 1.4 후퇴였다. 피난민들은 "쉬었다 간다"며 무작정 아무집 마당에 짐을 내려놓고 아무거나 뒤져 먹었다. '먼저 먹는 놈이 임자'라는 식이었다. 무법천지였다. 가뜩이나 없는 살림이 남아나질 않았다. 땅에 묻어둔 김칫독이 변소인 줄 알고 누군가 대변을 보기도 했다. 아무리 없는 살림이라도 김치는 몇 포기 담갔는데 그마저 못 먹게 된 것이다. 피난민들은 도끼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란 나무는 죄 베어냈다. 생나무라도 때며 추위를 피하려는 것이었다. 산은 차츰 벌거숭이로 변했다.

그 와중에 우리는 살던 집을 고모에게 내줘야 했다. 건너 동네 초입의 빈 집으로 이사했다. 누가 살다 버린 집이었다. 그놈의 집은 아무리 나무를 해다 불을 때도 따뜻해지지 않았다. 설날을 5일 앞둔 음력 12월 25일 아침, 아버지는 눈을 감으셨다. 어머니도 편찮으신 터라 장례 치를 일이 막막했다. 다른 방법이 없었다. 논두렁을 지나 고모에게 뛰어갔다. 저 멀리서 그 집 식구들이 보였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보니 문이 잠겨 있었다. 급한 마음에 문을 마구 두드렸다. 고모가 문을 열고 삐죽 내다봤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습니다. 도와주십시오."

고모는 문을 닫고 그냥 들어가버렸다.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다시 내달렸다. 동네 사랑채에 노인 대여섯 분이 앉아 있었다. 꾸벅 절하고 사정을 얘기했다. 노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얼굴을 쳐다보다가 그 중 건장한 세 명이 마지못해 곡괭이를 챙겨 나섰다.

노인들은 아버지 시신을 가마니로 둘둘 싸서 말더니 새끼로 묶었다. 시신을 둘러메고 뒷산으로 향했다. 추운 겨울이라 땅이 꽁꽁 얼어 있었다. 온 힘을 다해 겨우 흙을 파낸 뒤 시신을 눕혔다. 눈물을 흘릴 여유도 없었다. 어린 내 머릿속엔 친척이란 '남보다 못한 사람'으로 단단히 자리 잡았다.

그 집에 계속 있다가는 어머니마저 돌아가실 것 같았다. 평산 신씨의 본거지인 진천 이월면의 한 어른에게 부탁해 문간방을 얻었다.

그러나 몇 달 뒤, 어머니마저 세상을 등졌다. 어머니를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는 마을 공동 묘지에 묻었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찝찔한 게 입술을 적셨다. 그때 내 어린 시절도 함께 땅에 묻었다.

나중에 가 보니 공동 묘지가 없어졌다. 아버지의 묘 자리 역시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나는 천하의 불효자다. 그러나 부모님 모두 땅에서 태어나, 땅으로 편히 가셨으리라 믿는다. 성대한 묘를 남기는 게 무슨 소용인가. 죽어서까지 몇 평 남짓한 테두리에 갇혀 지내면 답답하지 않겠는가…. 장성한 뒤 이렇게 자위할 뿐이었다.

신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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