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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채소·과일, 남한 기술로 북한서 생산해 중국에 팔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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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오는 24일로 정부의 5·24 대북조치가 취해진 지 5년을 맞는다. 북한의 천안함 폭침 도발로 40여 명의 장병이 숨진 데 대응해 정부는 ▶우리 국민의 방북 불허 ▶남북교역 중단 ▶북한에 대한 신규 투자 불허 ▶북한 선박의 우리 해역 운항 불허 ▶대북 지원사업의 원칙적 보류 등을 발표했다.

 이 조치로 개성공단 가동과 취약 계층에 대한 인도적 지원을 제외한 남북 교류와 경협이 크게 위축됐다. 하지만 지난달 민간단체의 대북 비료 지원이 5년 만에 허용되고 나진-하산 프로젝트 시범 운송사업이 성공하면서 조금씩 숨통이 트이고 있다. 정부도 지난 1일 민간과 지방자치단체의 대북 교류를 폭넓게 허용하는 방침을 발표했다. 5·24 조치의 빗장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지만 작은 통로가 하나씩 열리고 있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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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지난 1월 30일자 노동신문에서 “우리 좋은 인민들에게 넉넉한 생활을 마련해 주지 못한 것을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는다”고 토로했다. 올 신년사에선 ‘인민 생활 향상’이란 표현을 다섯 차례나 반복했다. 집권 4년차에 접어든 김정은이 정권의 안정을 ‘먹는 문제’ 해결과 관련 지어 생각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따라서 남북경협 확대를 위해 5·24 조치를 어떻게 풀 것인가를 둘러싸고 북한·경제 전문가들이 다양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천안함 폭침에 대한 북한의 책임 있는 조치가 없는 상황에서 우리만의 일방적 해제는 사실상 어렵다. 5·24 조치를 우회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남북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이용해 중국·러시아 등 제3국들이 지하자원 개발, 인프라 지원 등을 통해 북한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높여가고 있는 딜레마를 어떻게든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다.

 조봉현 IBK경제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포지티브(Positive) 방식의 5·24 조치를 네거티브(Negative) 방식으로 방향을 트는 과감한 결단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포지티브 방식은 모든 남북 경협을 금지하고 예외적으로 허용하는 방식이다. 반면 네거티브 방식은 금지 품목을 지정하고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나머지를 허용하는 것이다.

 지난달 에이스침대 산하 재단법인인 에이스경암이 비닐하우스 조성에 필요한 비닐·비료·건설 자재 등 농업협력물자를 지원한 게 네거티브 방식의 대표적 사례로 볼 수 있다. 에이스경암의 협력물자 지원은 박근혜 대통령이 드레스덴 선언에서 제시한 복합영농단지 조성 등 민생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기 위해 처음 시범적으로 실시됐다. 비닐하우스 사업이 성공할 경우 북한 주민들은 사계절 안정적으로 먹거리를 제공받을 수 있게 될 전망이다. 남한이 지원하는 복합영농단지 조성이 북한의 주민 생활 향상으로 이어지는 상생 경협의 케이스가 될 수 있다는 관측이다. 비닐하우스 사업은 김정은이 지난해 ‘6월 8일 농장’에서 새로 건설한 온실(비닐하우스)을 현지지도하면서 “쌓였던 피로가 풀린다. 기분이 좋다.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을 정도로 북한 주민에겐 절실한 협력사업이다. 조봉현 연구위원은 “남북이 협력해 생산된 채소·과일을 북한 주민이 소비하고 일부는 중국으로 수출할 수도 있다”며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동북 3성이 새로운 시장으로 열린 만큼 남북한이 지혜를 모으면 중국의 고급 소비자를 겨냥한 신선한 과일·채소로 중국 시장을 공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전현준 동북아평화협력연구원장은 투 트랙 전략을 제시했다. 전 원장은 “북한의 사과와 경협제재를 분리해 대응해야 한다”며 “경협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에서 북한의 사과를 공식 유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듯이 과감한 시도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있다. 고르디우스 매듭은 고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 왕의 전차에 매달린 매듭을 아무도 풀지 못하자 한칼에 매듭을 잘라 문제를 해결했다는 전설에서 나왔다. 임을출 경남대 교수는 “5·24 조치의 우회전략도 한계가 있는 만큼 과감하게 전제 조건 없이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임 교수는 “우회전략들도 일시적인 효과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한다”며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우리가 쥐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말했다.

 김석진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은 “비상업적 교류인 대북 지원이나 드레스덴 선언에서 밝힌 개발협력(농업·보건·의료)은 지금보다 더 과감하게 풀고 상업적 교류는 남북회담 이후 풀어야 한다”며 2단계 해법을 강조했다.

 한국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북한 진출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북한은 AIIB에 가입 의사를 밝혔지만 중국의 거부로 무산된 상태다. 북한이 창립 회원국으로 참여하지 못한다고 해서 AIIB와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다. AIIB 총회 승인을 거치면 비회원국에도 자금 및 투자 지원을 허용하고 있다. 따라서 정부가 AIIB를 통해 북한의 개혁·개방을 이끌어낼 방안이 없는지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되면 AIIB를 북한 변화의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한의 핵문제가 해결되거나 진전되는 것과 병행해 AIIB가 북한의 개발원조를 하는 데 좋은 창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도 “5·24 조치의 해제는 북한을 AIIB에 끌어들이는 데 활용할 수 있다”며 “북한이 앞으로 개혁·개방하는 과정에서 북한판 마셜플랜을 작동시키기 위해 AIIB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5·24 조치=2010년 3월 26일 북한이 천안함 폭침을 도발하자 5월 24일 정부가 내놓은 대북제재 조치. 이 조치로 북한 방문·경제 협력 등이 전면 중단됐으며 인도적인 목적의 대북 지원도 정부와 사전 협의를 거치지 않으면 할 수 없게 됐다.

◆ 특별취재팀=팀장 고수석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정영교 통일문화연구소 연구원, 김준술·김기환 경제부문 기자, 전수진 정치국제부문 기자 ko.soos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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