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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남한 마약범 데려다 필로폰 제조 … 황장엽 암살 지시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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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북한 당국이 한국의 마약 제조자들을 밀입북시켜 필로폰을 제조하게 하고, 이들에게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2010년 사망) 등 반북 인사 암살 지령까지 내렸다고 검찰이 밝혔다. 이는 국가정보원이 최근 탈북자로 위장해 귀순한 북한 인민무력부 산하 정찰총국 출신 공작원 장모씨를 신문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서울중앙지검 공안1부(부장 백재명)는 필로폰 제조와 암살 지령 등을 위해 장씨를 접촉한 김모(62)·방모(68)·황모(56)씨를 마약류관리법 위반, 국가보안법상 특수잠입·탈출 및 살인예비 혐의로 구속기소했다고 17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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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검찰에 따르면 방씨 등은 공작원 장씨의 지령을 받고 2000년 7월 북한에 밀입국해 황해도 사리원 인근 모처에서 필로폰 70㎏을 제조했다. 국내 ‘필로폰 제조 기술자’로 활동하던 방씨가 또 다른 공작원 A씨로부터 동업 제의를 받으면서다.

 방씨는 지인 김씨·황씨를 끌어들였다. 북한이 제조 장소를 제공하고 필로폰 1t을 만들면 절반인 500㎏을 넘겨주기로 했으나 실제로는 70㎏(수백억원어치)을 제조했다. 방씨 등은 “필로폰 제조에 필요한 반응로·냉각기 등 설비는 중국에서 구입하고, 필로폰 원료는 국내에서 구입해 북한으로 들여갔다”고 진술했다. 밀수에는 중국 단둥~북한 신의주 간 국제화물 열차와 부산~나진항 화물선이 이용됐다. 이들은 압록강을 건너 북한을 오갈 때 고무보트를 이용했으며, 공작원 장씨가 동행했다고 한다. 북한 보위부 소속 군인들의 보호도 받았다. 검찰 관계자는 “경제난에 시달리던 대남 공작 조직이 국내 필로폰 조직을 끌어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검찰 조사 결과 북한 당국은 필로폰 제조에 가담했던 이들에게 반북 인사 암살까지 지시했다. 공작원 장씨가 2009년 10월 김씨에게 “남한 내 안전가옥에 머무르는 황장엽 전 비서와 강철환(탈북자 출신 북한 체제 비판 활동가)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 뒤인 그해 11월 정찰총국 소속 공작원 김명호씨 등 3명도 황 전 비서 살해 지시를 받았다. 살해 지시자는 정찰총국장인 김영철 상장(우리의 중장)이었던 것으로 2010년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장씨 역시 국정원 신문에서 “당시 정찰총국 본부 차원의 지시가 있었다”고 진술했다.

 이후 김씨는 2010년 10월까지 10여 차례 중국에 건너가 황 전 비서의 암살 실행 방법, 진행 상황 등을 장씨에게 보고했다. 활동비조로 10여 차례 온라인 송금, 현금 등으로 4만 달러를 받았다고 한다. 김씨는 “국내에서 특수 부대원 출신, 조직 폭력배, 청부살인업자 등을 접촉했다”고 진술했다. 이동 중인 황 전 비서를 차량으로 쳐서 사고사로 위장하거나 흉기를 이용해 사살하는 방법이 고안됐다고 한다. 2010년 10월 황 전 비서가 자택에서 노환으로 사망하기 불과 한두 달 전 구체적인 ‘실행 날짜’까지 나왔던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김씨가 장씨에게 요구했던 공작금 100만 달러를 제때 받지 못하면서 일정이 미뤄졌고, 실제 암살 시도는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김씨는 이 밖에도 2013년 5월 ‘2012-2013 한국군 무기연감’을 구해 장씨에게 건네고 남한 내 가스 저장소, 열병합발전소 위치 등의 정보를 제공한 뒤 장씨로부터 건당 1000달러를 받은 혐의도 받고 있다.

 또 다른 필로폰 제조책 황씨도 장씨로부터 2004년 4월 의사 출신 북한 인권 운동가인 독일인 노르베르트 폴러첸(57)을 암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폴러첸은 1999년 7월~2000년 12월 북한에서 의사로 활동하다가 체제 비판을 이유로 추방됐다. 북한 당 차원에서 폴러첸 암살 계획 중단을 결정해 실행까지 가지는 않았다고 한다.

 현행법상 영리 목적을 위한 마약 제조는 공소시효가 15년이다. 검찰은 시효 만료(2015년 7월)를 2개월 앞두고 이들을 기소했다.

이유정 기자 uu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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