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연금 거들일 없앨 수 없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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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만나는 사람마다 『물난리를 겪지 않았읍니까?』 『수해를 입지 않았읍니까?』라고 안부를 묻는다. 실감나는 인사다.

<수해는 없읍니까>
지난 일요일 하오를 텔리비전 앞에서 보낸 사람이면 누구나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눌 수 없었을 것이다. 오물이나 다름없는 거대한 흙탕물을 줄기차게 실어 나르는 한강의 출렁임이 화면 가득히 다가오면 우리가 올림픽이다, 풍년이다 떠들면서 너무 수선을 피우지 않았나 하고 후회스러웠다. 그 후회는 곧장 다리가 떠내려간다면, 한강이 범람한다면 어쩔 것인가 라는 요망스런 기우로 변했고 여전히 불퉁하게 부어있는 하늘을 원망스럽게 쳐다보곤 했다.물바다가 되고만 풍납동 일대가 비칠 때는 도대체 우리의 건설행정이 아직도 저 모양으로 졸속인가 하고 개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물 구경을 방안에 앉아서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시시각각으로 위험수위를 오르내리는 한강수위와 수량, 포효하는 듯한 소양 댐의 배수 광경을 근접촬영으로 보여주는 속보성, 헬리콤터와 고무보트가 동원되어 그야말로 공수양면작전으로 이재민을 구출하는 장면 등을 쳐다보면서도 우리의 국력도 이제 이만큼 신장되었구나 하고 실감할 수 있었던 고마움과 함께 갖는 마음이었다.
수해와 가뭄이 연중행사나 다름없다는 오늘의 우리 현실은 우리 나라가 여전히 농업국임을 반증하는 예라고 하겠다. 또한 천재지변이 있을 때마다 전국민의 즉각적인 의연금 각출로 피해를 원상복구 시키는 관례도 우리 나라만의 미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상 이런 관례나 연중행사는 없을수록 좋고, 미리미리 예상되는 피해지역을 없애두고, 피해액을 극소화시켜두는 나라가 훌륭한 나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고질화된 천재지변으로 인해 안양천 변 일대는 여름에도 물난리를 치르고, 주택의 대량공급이라는 미명아래 신축아파트단지가 삽시간에 수중도시로 변하고, 배수문이 붕괴되는 날림공사가 횡행하고 있다. 게다가 「나만 살고 보자」는 극성꾼 들이 식빵이나 라면 따위를 사재기에 혈안이 된다. 이런 「준비성 없음」과 이기주의로 매년 한심스런 연중행사를 되풀이하면서도 앞으로 닥칠 큰 행사들을 잘 치러낼 수 있을까 걱정이다.

<눈물짓던 농부>
「아, 대한민국」이란 유행가는 듣기 좋은 조국찬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 노래의 가사는 아무 의미도 없는, 감상적인 넋두리에 불과하다.
우리 나라가 자원빈국에 소국이라는 현실인식이 결여되어있기 때문에 그렇다. 기후도 좋지 않고, 땀도 기름지지 못하고, 지정학적으로 외세의 압력이 그칠 날이 없었음에도 오늘날 이만큼 「아름다운 조국」을 만들었다고 해야 말이 맞다.
미국처럼 대국에 자원부국이면 구태여 「아름다운 강산」을 들먹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때맞춰 비오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어서 풍년이 들었다는 말은 하나마나다. 수해가 막심했는데도 전국민의 피나는 노력으로 풍년을 맞이했을 때야말로 「아, 대한민국」을, 「아름다운 강산」을 목청껏 노래부를 수 있을 것이다.
어릴 때 낙동강 둑이 터져 소와 짐채 수박 오물 등이 둥둥 떠다니고, 철길과 침목이 논빼미 위에 나동그라져 있는 광경을 둔덕에 올라가서 바라본적이 있다. 며칠 후 시나브로 물이 빠졌을 때, 논빼미에 앉아 시체처럼 즐비하게 쓰러져 있는 나락을 쳐다보며 눈물을 뚝뚝 흘리던 농부의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이번의 수해를 겪으면서도 당연히 그 농부의 모습을 떠올렸는데 우리 민족은 악조건이 겹칠수록 더욱 모질게 살아남을 위대한 민족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이어갔다.
풍년을 기약하는 마음이야 농부에 뒤질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전시위주 지양을>
덧붙여 바람이 있다면 사재기에 혈안이 된 투기꾼들의 이기주의나 탁류에 휩쓸려 갔으면 싶고, 수재민 구호성금을 앞다투어 낸 국민학교생들의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서라도 하수도 시설부터 제대로 한 후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했으면 싶고, 구호성금이 전시위주로 사용되는 또 다른 연중행사가 이번에는 제발 지양되었으면 싶다.
이재민이나 농사의 피해를 본 농민에 대한 대책이 착실하게 진행되어야 한다.
온 국민이 나서서 이들을 위한 성금을 모으고 구호작업을 하는 것이 아름다운 일이기는 하지만 그보다 책임질 사람은 책임지고 뒤처리할 사람들은 열심히 뒤처리를 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 해서 앞으로는 이런 일이 근본적으로 막아질 수 있겠다하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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