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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59년…일 국민의 "정신적 지주"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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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일황「히로히또」(유인). 일본인들은 그를 덴노헤이까(천황폐하)라 부른다.
그는 국가원수로서 이미 세상을 떠난 장개석 자유중국총통과 「하일레·셀라시에」이디오피아 황제를 비롯한 전세계 어느 누구보다도 오랜 재위를 자랑하고 있다.
지난 1926년12월25일 국화문장으로 상징되는 일황(1백24대)자리에 오른 「히로히또」일황은 올해로 즉위 59년을 맞고 있다. 1912년에 사거함으로써 재위 후년7개월을 기록한 조부인 명치천황보다 더 오래 일황의 지위를 지키고있다.
그가 크리스머스에 일황의 자리에 오른 것은 어떤 종교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며 바로 이날 그의 부왕이었던 대정 천황이 병사한 뒤를 이어 헌법에 따라 천황으로 즉위하게 된 것뿐이다.
작은 키에 얼굴에 표정이 없는 「히로히또」일황. 천황은 전전에는 최고권력자로서, 또는 군의 통수권자로서, 현인신으로서 일본국민위에 절대적으로 군림해왔으나 이런것들이 전후에 다물어지고 말았다. 1946년에는 일황 자신이 「신성」을 부인하고 「인간선언」을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현재의 일황밑에서 치른 전갱이 패전으로 끝나고 그 역정이 참담했다 하더라도 그가 여전히 일반국민위에 떠받들려지고 있는 것은 변함이 없다. 전후미국은 천황제도가 10개 사단과 맞먹는 힘을 지니고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통해 일본을 통치했다. 비록 천황제의 개념은 변질되었어도 그것이 갖는 차력은 일본을 부흥시키는 밑천이 되었다.
일황에 대한 국민들의 신앙은 공산당도 외면하지 못할만큼 여전히 저력을 갖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민주주의 시대에도 「히로히또」일황은 일본사회를 통합해 가는 핵심에 자리잡고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히로히또」일황은 한국침략·태평양전쟁 등 근대 세계사의 뒷 무대에서 주요인물로 등장해왔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잊혀질 수 없는 사람이다. 당시 군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의 집권세력이 비록 일황을 이용해서 세계적 범죄정책을 수행했다 하더라도 한국침략 등에 대한 그의 책임은 결코 가벼워질 수 없다.
「히로히또」일황은 그의 아버지 대정 천황이 병으로 드러누웠던 황태자시절에 현재의 「나가꼬」(양자) 황후와 약혼했다. 겨우 18세 되었을 때였다. 「나가꼬」황후는 「히로히또」일황보다 몇 달 늦은 동갑이었다.
당시 「히로히또」황태자의 배우자 선택을 놓고 군부는 오랜 암투와 모략·음모를 꾸몄다. 관동대지진까지 겹쳐 그들의 결혼은 약혼한지 6년후(1924년)에야 이루어졌다. 그사이 이들은 단 9번밖에 만나지 못할만큼 불행한 일생이 시작되었다.
그의 재위중 일본은 한국침략·만주사변·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1941년12월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이 시작되기 훨씬 전 미국의 「루스벨트」대통령은 일황에게 친서를 발송했으나 일본의 군부검열관은 전쟁이 터지기 직전까지 일체의 전문취급을 보류해 버렸다. 후일「히로히또」일황은 『만약 내가 하루만 빨리 「루스벨트」대통령의 친서를 받았더라면 진주만 공격을 중지시켰을 것』이라고 털어놓은 적이 있었다.
그는 1945년8월15일낮 12시1분전 전쟁 종말을 고하는 최초의 육성방송을 통해 「현신」에서 「인간」으로 돌아왔음을 알렸다. 『일본은 세계정세에 비추어 포츠담선언을 수락하기로 통고했다』는 항복연설이었다.
종전 직후 「히로히또」일황은 「맥아더」연합군총사령관을 직접 찾아가 『전쟁수행중 나의 국민이 취한 모든 정치 및 행동에 유일한 책임자로서 본인은 귀하가 대표하는 권력의 심판대에 본인을 내맡기기 위해 장군을 찾아왔다』고 말했다. 「맥아더」장군은 감동했다. 그는 「히로히또」일황을 전범자로 체포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으며 「트루먼」미대통령은 그의 결정을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역사가들은 「히로히또」일황이 생각보다도 월등히 군국주의자적 역할을 했으며 사실상 침략의 주동자 구실을 했다는 「천황전범론」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히로히또」일황은 71년 유럽, 75년 미국을 방문, 일본 2천6백년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여행을 떠난 천황이었으며 전쟁책임의 짐을 벗고 대미우호의 가교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는 「마크·트웨인」의 『왕자와 거지』같은 것을 한번 해보고 싶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하루라도 평민이 돼보고 싶다는 것이다.
그는 생물학에 조예가 깊으며 과학연구단체에도 기금을 희사하고있다. <최철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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