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피"통고보다 물이 먼저…-권일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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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기를 들쳐업고 이불보따리를 머리위에 인 부인네. 하나라도 더 건질세라 손에손에 짐보따리를 엮어든 할머니. 불룩한 배위로 TV를 받쳐들고 힘들어 쩔쩔매는 임산부. 한결같이 헝클어진 머리에 이마위로는 빗물이 흘러 내리고있었다. 영화에서나 봄직한 피난민들이었다.
망원동은 바로 전쟁터였다. 작은 하수도를 통해 스믈스믈 목을 죄어왔다. 갑작스럽게 쳐들어온게 아니라 이틀전부터 예고하고 있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피난민들은 1시간전까지만해도 방안에서 TV를 통해 야구구경을 할만큼 위기를 느끼지못했다. 한강수위가 자꾸 올라가기만 하는 것이 걱정스럽기는 했지만 『안심하라』는 시당국의 말씀이 더 믿음직스러웠다. TV에서는 『논에서 빨리물을 빼고 넘어진 벼는 일으켜 세우라』는 농촌에서는 삼척동자도 알만한 얘기를 「지도」「계몽」이라며 되풀이하고 있었다.
이 시간에 TV를 볼 농민이 몇이나 될까싶기도 했지만 그런대로 의미가 있었다. 다만 방송만 잘 들으면 된다기에 그러려니 믿고 있던 터였다.
이들은 마루까지 물이 찬 후에야 비로소 큰일났다는 것을 알았다. 주섬주섬 짐을 챙기려 했을 때는 마음이 급해 어찌할 바를 몰랐다. 마당에는 정화조에서 떠오른 오물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그제서야 대문밖에서 『물이쳐 들어온다』는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렸다.
득으로 연결된 유수지의 철문은 콘크리트기둥과 함께 나동그라져 있었고 힘을 얻은 강물은 용솟음치듯 둑을 파먹으며 밀려들었다. 강둑이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안 무너진다해도 동네가 물바다가 되는것은 보나마나였다. 방정스럽게도 끔찍한 광경이 자꾸만 떠올랐다. 노아의 방주 생각도 났다. 둑위에는 2명의 경찰관이 덩그러니 마주보며 서있을 뿐 머리를 짜내 대책을 세우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물이 들대로 든 후에야 대피하라고 일러주고 있었다.『현장에 나갔다』며 자리를 비운 공무원은 아무도 둑주변에 없었다.
당국에서 토목기술자와 시설·장비를 동원하고 나선것은 한참후였지만 그나마 다행이었다.
공사를 허술하게 했으면 대책이나마 빨리 세우든지 아니면 일찌기라도 주민들에게 솔직하게 위험한 것을 알리고 대피토록 했어야 옳았다. 백번들은 것보다 한번 보는게 낫다는데 현장을 봐야 대책이라도 세울것이 아닌가.
나으리들이 모두 고대광실에 살아 물난리쯤은 안중에 없는 것일까. 아니면 모두 앉은뱅이거나 귀머거리 벙어리여서 현장에 못나가거나 감각이 마비된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참으로 아슬아슬하고 분통터지는 일요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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