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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103) 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36) 초창기의 다방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끝으로 다방이야기를 할 차례인데, 찻집은 이제와서 확실히 서울의 한 명물이 되었다. 골목마다 다방이 없는 곳이 없고, 이름도 처음에는 다방, 다음에는 다실로 변하더니 요새 와서는 또 찻집이 되었다.
서울에 다방이 생긴 것도 카페가 생길 무렵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카페가 충무로2가 큰 길에서 아까다마(적옥)지점으로 문을 열었듯이 다방도 같은 동네에서 명치제과지점으로 문을 열었다.
제과점이지만 이왕이면 차도 함께 팔아 보자는 생각으로 시작한것인데, 차맛이 좋아서 사람이 모여듦으로 필경 찻집이 본업이 되어버렸다. 홍차나 코피나 모두 10전씩인데, 특히 이집 홍차는 맛이 좋기로 유명했다. 이것을 보고 생긴 것이 그 건넛집 「금강산」이었고,종로 북촌에 다방이 생긴 것은 훨씬 뒤의 일이다. 「명과」나 「금강산」이 다 일본인 경영이었는데, 조선호텔 건너편에 동경미술학교 졸업생인 이순석(전 서울대교수· 조각가)이 「낙랑팔러」라는 다방을 냈다. 이「낙랑」이 번창해져서 젊은 조선사람 지식층은 한때 모두 이리로 몰렸다.
이상의 친구인 변이라는 문학청년이 차를 나르는 심부름을 했고, 정인택·이상이 늘 이곳에 모였고 박태원도 나타났다. 변이란 사나이는 서양화가로 이름을 날리던 수화 김환기의 처남이었는데, 별명이「무린」이었다. 무린이란 박태원이가 지은 별명인데, 그때 일본에서 무전린태랑이라는 젊은 작가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이 무전린태랑이 동경 조일신문에 『은좌팔정』이라는 풍속세태소설을 연재해 호평을 받고있었는데, 박태원· 정인택· 이상등이 모인 자리에서 변이 느닷없이『내가 소설을 쓴다면「무린」정도는 되겠지』 하고 자신있게 말하였다. 그러자 박이 이 말을 받아 자못 경멸하는 말투로 『무어, 자네가 「무린」만큼 쓰겠단 말야!』하고 어이없다는 듯이 껄껄 웃었다.
그뒤로부터 변의 별명을 박이「무린」이라고 지어 툭하면「무린」「무린」이라고 놀렸다.
이 일이 있은지 얼마 뒤에 박이『천변풍경』이라는 세태소설을 썼다. 이것을 본 변이 우리들 있는데서 박에 대한 분풀이인지『제가 무린을 본떠「천변풍경」을 쓰고서 날보고 어쩌니 저쩌니 한단 말야!』하고 투덜거렸다.「악랑팔러」에 대한 객담이 너무 길었는데, 그 다방에는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고 화가·영화인등 예술가들의 소굴이 되었었다. 이외에「플라타나스」라는 다방이 상업은행근처에 있었는데, 아담한 다방으로 예술가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북촌에서는 관훈동 꼭대기에 있는「카카튜」가 유명했다. 이경손이라는 영화감독이 경영하였는데,「카카튜」란 무슨 뜻인지 알수없고, 나는 그 다방에 가본 일도 없지만, 연극인들과 영화인들이 많이 간다는 말을 들었다.
종로 큰길에는「낙원카페」건너편 큰길가에「멕시코」라는 다방이 있었다. 좁은 방에 많은 사람이 들끓었는데, 장소가 우미관 건너편인 만큼 우미관패들이라는 불량배들이 들락날락하였고 밤이 늦으면「낙원카페」에서 나오는 술꾼들이 차로 입가심한다고 몰려들어 밤늦도록 영업을 했다.
이밖에 유명한 사람들이 경영하던 다방으로 광교부근에 「올림피아」가 있었다. 해방후 자유당시절 나는 새라도 떨어뜨릴 위세를 떨치던 만송 이기붕이 해방전 미국에서 돌아와 할것이 없었으므로 부인과 함께 경영하였는데, 조병옥·구자옥· 변영노등이 자주 들렀다고 한다. 여배우 복혜숙이 인사동에 있는 계명구락부 아래층에「비너스」라는 바를 내고 낮에는 차를 팔았다. 연예인들이 많이 모였다. 이밖에 이상이 하던 신신백화점 위에 있는 「제비」, 음악평론가 김관이 하던 명동의「에리사」, 토월회동인연학년이 하던 명동의 「트로이카」도 낮에는 보트카대신 향기 높은 홍차를 팔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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