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서리 눈감아주던 「시골인심」은 옛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이웃사촌요? 요즘은 친사촌간에도 제삿밥 나눠먹기 어렵습니다』 경북 성주군 선남면 이용석 면장(51)은 「농촌인심」은 이제 옛말이라고 했다. 후하지도 두텁지도 않은 것이다. 세월따라 인심도 변하게 마련-. 우리역사의 길이만큼이나 오랜세월, 정으로 얽히고 믿음으로 다져 피보다 진한 유대를 이루어왔던 우리 농촌사회가 「이웃사촌」의 전통을 급격히 허물고 있다. 하나의 소리없는 혁명임에 틀림없다. 산업화·도시화의 거센 물결속에 전통유대가 무너지고 있는 현장.

<사례1-캠핑학생들 봉변>
지난달 13일 하오3시 강원도 명주군 사천해수욕장 부근 박모씨(56) 집앞.
박씨의 어머니(75)가 20대 대학생 3명의 허리춤을 붙잡고 동네가 떠나가라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학교에서 배운게 도둑질이냐, 이 나쁜놈들아. 올 농사망친것 백만원을 물어내라, 아니면 경찰서로 가자』
근처에서 캠핑을 하던 서울 모대학생 3명이 박씨의 밭에서 호박2개와 풋고추 20여개를 따나오다 붙들린 것이다. 『할머니 정말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싱싱한 풋고추를 넣은 호박찌개 맛을 좀 보려다 날도둑(?)이 된 학생들은 얼굴이 벌개진채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지만 할머니는 막무가내.
한참만에 어머니의 노성을 듣고 뛰어온 아들 박씨가 말려서야 할머니는 허리춤을 놓았고 소동은 끝났다.

<사례2-피서객 민박싸움>
강원도 삼척군 근덕면 덕산리 김종철씨(43·가명)와 박혁우씨(46·가명)는 어려서부터 앞뒷집에 살면서 형님아우하며 한집안 식구처럼 지내왔다.
그러나 80년여름 마을앞 근덕해수욕장이 도시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부터 둘은 견원지간이 돼버렸다.
피서객들에게 민박을 제공하다 급기야 두 사람이 동종업의 경쟁자가 된 것이다. 박씨가 8칸 기와집에 건물은 좋으나 김씨집(4칸 참석집)보다 길목이 뒤져 매번 손님을 뺏기자 김씨집 대문앞에 서서 손님을 유객한 것이 다툼의 발단이 됐다.
처음엔 단순한 언쟁에 그쳤으나 곧이어 1박에 5천원짜리 방값을 3천원씩에 덤핑, 요금전쟁을 벌이게 됐고 피서철이 끝날 무렵엔 집안식구들까지 모두 동원되는 전쟁(?)을 치렀다.
동네사람들은 『이웃끼리 무슨 창피냐』며 화해를 붙이려 애썼지만 열무소용, 5년째 등을 지고 산다.

<사례3-염소36마리 죽여>
지난6월13일 하오5시쯤 경북청도군 매전면 예전동 산158 이석기씨(57)집 복숭아 밭에서 풀을 뜯던 이 마을 한진태씨(52)등 14가구의 흑염소 1백여마리중 36마리(싯가3백37만원)가 독극물에 중독돼 떼죽음을 당했다.
경찰조사결과 흑염소 독살극의 주인공은 바로 복숭아밭 주인 이씨.
이씨는 평소 마을주민들이 흑염소를 풀어놓는 바람에 이들 흑염소가 복숭아 밭으로 몰려와 복숭아 나무잎과 껍질을 갉아먹는등 피해를 보아 주민들과 자주 입씨름을 벌여오다 이날상오 9시께 쥐약과 농약을 보리에 섞어 자신의 복숭아밭 14개소에 뿌려놓은 것. 이씨는 재물손괴혐의로 구속됐다.

<사례4-입시생불구 고소>
경북 칠곡군 왜관읍 우전동 이모군(17·S고교3년)은 지난달 3일 하오8시께 아버지의 오토바이(1백25cc)를 타고 왜관10동 앞길을 달리다 맞은편에서 자전거를 타고오던 이웃주민 김일봉씨(47)를 치어 전치6주의 상처를 입혔다.
경찰은 가해자가 학생신분임을 고려, 불구속처리하려 했으나 피해자 김씨가 치료비와 위자료로 2백만원을 고집해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한채 이군은 대입학력고사를 앞두고 구속됐다.
칠곡경찰서 수사과장 이룡수경감은 『옛날에는 이웃간에 사소한 주먹다짐에 보신용 개한마리를 잡아주면 그만이었는데 요즘은 따귀한대 때리고 l백만원 물어주기 예사』라며 양보와 대화가 사라진 지역풍습을 개탄했다.

<사례5-인척간 주먹다짐>
지난6월6일 하오3시께 경북 군위군 고노면 화수2동 장두명씨(55)는 모내기를 하다 집안조카뻘 되는 장동섭씨(54)의 논과 경계를 이루는 논두렁(폭30cm)에 박힌 지름25cm가량의 돌을 뽑고 묘를 4∼5포기 더 심은 뒤 그 돌을 본래의 자리에 다시 꽂아 놓았다.
이를본 장동섭씨가 『왜 남의 논두렁에 박힌 돌을 주인허락도 없이 함부로 뽑느냐』고 해 시비가 벌어졌다.
장두명씨는 『아저씨한테 대하는 태도가 불손하다』고 맞서 욕설이 오가던 끝에 조카 장동섭씨가 장두명씨의 얼굴을 한대 때렸다. 두명씨는 이빨한개가 부러져 전치4주의 진단이 났다.
두사람은 2년전 동섭씨가 마을앞 조상묘옆 소나무에 소를 매어놓은 것을 두명씨 부인(52)이 『조상의 봉분을 허물 위험이 있다』고 나무란 것이 시비가 돼 서로 감정을 품어왔었다. 가세를 두고도 서로 『업신여긴다』며 사사건건 티격태격이기 일쑤.
이런 사이에 주먹다짐까지 빚어졌고 동섭씨는 사과는 커녕 『고소할테면 해보라』고 도리어 큰소리를 쳤다.
분에 못이긴 두명씨는 군위경찰서 고노지서에 고소장을 냈다.
평소 두사람 사이를 잘 아는 고노지서장 이경제경사(54)가 『아무리 감정이 앞선다해도 씨족간에 구속사태로까지 번져야 되겠느냐』며 나서 두명씨를 설득시켜 치료비 50만원으로 합의를 보게했다. 경찰이 화해를 붙인것.

<사례6-도로확장에 반발>
각자의 이익만을 주장하느라 마을 공동사업이 벽에 부딪쳐 있다.
전남 광산군 하남면 20개 마을주민 7천여명은 면사무소∼흑우리간 비포장길 1.5km(너비6m)를 너비10m로 확장하고 포장하는 것이 오랜 숙원.
주민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건설부등 관계요로에 건의해 오다 드디어 지난해 11월7일 공사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막상 착공단계에 이르자 몇몇주민이 반대하고 나섰다.
토지가 수용될 지주47명중 하남리 김모씨(50)등 3명이 구부러진 길을 반듯하게 내고 보상금도 적정가격으로 지급하라는 등의 이유로 토지수용에 따른 보상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사례7-술에 농약타 보복>
경북 청도군 금천면 소천2동 이간제씨(48)는 지난 6월 이농으로 비게된 이웃초가집 한채(대지1백평·건평16평)를 사고싶었다. 싸게 사려고 값을 퉁기던 중 9촌조카인 이수광씨(37)가 80만원에 먼저 사버렸다.
안타까와진 이씨는 수광씨에게 『20만원의 웃돈을 더 얹어줄테니 넘겨달라』고 여러차례 간청했으나 거절당했다. 기분이 상한 이씨는 그뒤 조카 수광씨에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헐뜯기 시작했다.
그러나 주민들의 여론은 아저씨인 이간제씨를 더 나쁘다는 쪽이었다. 무안을 당한 이씨는 지난1일 하오9시30분께 이수광씨집 부엌에 숨어들어가 농주가든 주전자에 극약을 타버리고 말았다.
이튿날인 2일 상오5시30분께 이수광씨가 아침밭일을 나가다 이 농주를 마시고 신음하다 숨졌다. 졸지에 아들을 잃은 이씨의 아버지 이서근씨(77)도 아들이 비명에 간 것을 비관, 같은 농주를 마시고 뒤따라 숨져 줄초상이 벌어졌다.

<기타-농기 사용료 받아>
고소·고발이 크게 늘어난 것도 농촌변화의 한 증거. 막걸리 한사발이면 끝날 수 있는 일들까지 굳이 경찰서로 끌고 들어가 소위 「법」으로 해결하려는 풍조가 번져있다.
충남 연기군 금남면 대평리 이상문(70)할아버지는 『요즘엔 누구네 집에 결혼잔치가 있는지 통 모르겠다』고 불평한다. 결혼식이면 동네가 떠나가라고 왁자지껄 했는데 요즘은 읍내 예식장에서 간편히 치르기 때문에 사람들 만날 기회가 없어 서운하다는 것.
이씨는 『이웃집에서 강아지를 낳았길래 한마리 얻을랬더니 다른집에서 벌써 돈을 다 받아 놨다더군. 이젠 강아지도 돈주고 사게됐으니 시골인심은 옛말이여』라고 탄식했다.
산업화의 거센 물결속에 TV보급·교통수단의 발달은 우리 농촌에도 도시적인 사고와 생활방식을 점차 확산시키면서 지연·혈연에 기초한 공동사회의 유대가 엷어지고 개인주의적 이익사회로 농촌을 변모시키고 있다.
농촌출신의 30대 이상인 사람이라면 향수를 느끼는 「서리」. 보리·콩·과일·닭…철따라 별미를 주인몰래 훔쳐먹는 또래들의 장난조차 이젠 「절도」로 변했다.
탈곡기·소목기·타작기등 농기구도 무료로 빌려주고 빌어썼으나 이젠 꼬박꼬박 사용료를 주고받는다. 저녁식사후 이웃집에 가 담배잎 엮어주는것 역시 일종의 마실이었으나 지금은 어림없다. 한발에 50원씩 능률급으로 거래된다.

<특별취재반>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