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생각은] 북한 달러 위조 명백한 국제범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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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협약은 이어 상기한 범죄의 양형에 있어 내외국 통화를 구별해서는 안 되며, 처벌을 상호주의적 조건 아래 두어서도 안 된다고 규정한다(제5조). 협약은 또한 범죄인 인도조약의 존재가 범죄인 인도를 가능케 하는 조건으로 돼 있는 국가에 대해서는 이 협약이 범죄인 인도조약을 대신한다고 규정함으로써(제10조) 자국에서 처벌하지 않으면 반드시 인도해야 한다는 원칙을 관철하고 있다.

조약상의 의무는 당해 조약의 당사국에 대해서만 적용된다는 것이 국제법상의 원칙이다. 하지만 채택 후 근 80년이 지난 이 협약의 내용은 이미 관습법으로 굳어진 것이기에 국제사회의 모든 국가에 적용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최근 문제되고 있는 북한 수퍼노트(위조지폐)의 경우는 사정이 다르다. 위 협약이 사인(私人)에 의한 통화위조를 전제로 한 것임에 비해 수퍼노트의 경우는 그 주체가 국가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불거지자 우리 정부는 '확고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면서 북한의 통화위조 관련에 의문을 제기하고 나섰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두 가지 점을 잊어서는 안 되리라 본다.

첫째, 국제관계에서는 정황증거로 족하며 '확고한 증거'가 필요치 않다는 사실이다. 46년 10월 22일 영국 군함 4척이 알바니아 영해를 통과하던 중 기뢰에 부딪힌 일이 있다. 이 사건은 국제사법재판소에 부탁됐는데, 재판소는 알바니아가 직접 기뢰를 부설한 증거는 없지만 정황증거상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면서 위험을 알면서도 경고하지 않은 알바니아에 손해배상 책임이 있다고 판정했다. 영역주권상 제3국이 타국 영역 안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국제관계에서는 정황증거로 족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둘째, 국제법상 통화위조에는 그 위조 및 변조 이외에 그것을 행사하는 행위, 그리고 이를 취득하거나 타국에 반입하는 행위까지 포함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북한의 수퍼노트 관련이 문제된 89년 이후 북한 외교관이 수십만 달러의 수퍼노트를 세탁하려다 적발된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이를 사적 행위로 간주, 국가와의 관련을 차단하기에는 이미 그 규모나 빈도에 있어 한계를 훨씬 넘어섰다고 할 것이다.

이제 '확고한 증거'를 되뇌면서 북한의 통화위조 관련에 의문을 제기하기에는 시간이 늦었다. 통화위조 행위는 세계 경제질서를 훼손하는 명백한 국제범죄이기 때문에 이에 대해선 범죄진압 차원에서 대처해야 함이 필요하리라고 본다.

김찬규 경희대 명예교수·국제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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