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5)-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28)최초의 서양화「자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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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레미옹」과는 약속이 돼있어서 파리에 있는 그의 주소도 알고 있고, 불어에는 자신이 있으므로 학비만 마련되면 갈 수 있었지만 그 학비가 문제였다. 불어를 잘하므로 외국인이라도 취직할 데가 있었으면 좋겠지만 프랑스 사람은 외국사람을 채용하지 않았다. 프랑스에서는 제 돈이 있어야만 가서 공부할 수 있었다.
여러가지로 생각한 결과 일본동경이 나을 것 같아서 동경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동경에는 사촌형 되는 고희경이 왕태자 전하를 모시고 살고 있었다.
춘곡은 이렇게 해서 스물다섯의 나이로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하였다. 그때가 1909년이었는데, 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아 일본의 보호국이기는 하지만 대한제국의 연호를 쓰고 있어서 그때가 융희3년이었다. 춘곡은 일찌기 대한제국 궁내부주사·궁내부예식관을 지낸 고등관이었으므로 준 국빈대우를 받아 대우가 융숭하였다. 교장은 장원행대낭, 지도교수는 낭도무인·강전삼낭조의 두 대가였다.
그동안 동양화를 배워왔다고 하므로 서양화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하고 그 실력을 테스트 하기 위해 춘곡을 데리고 석고 데생실로 갔다. 춘곡이 처음 보는 백토로 빚은 사람의 머리와 여자의 나체상이 즐비하게 놓여 있는 속에서 선생이 석고상 하나를 가리키면서 『이것이 무슨 빛깔로 보입니까?』하고 물었다. 춘곡은 내심으로 왜 이런 유치한 질문을 하는가 하고 약간 불쾌했지만 체면이 있으므로 정중하게『흰 빛깔입니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선생은 그 석고상의 그림자 쪽을 가리키면서 『그러면 이것은 무슨 색으로 보입니까?』하고 재차 물었다.
『물론 그 쪽도 흰 빛깔이지요』그랬더니 그 선생은 약간 난처한 얼굴로 『앞쪽은 광선을 받아 희게 보이지만 그 반대쪽은 광선을 못 받아 그늘이 졌는데 그래도 같은 빛깔로 보입니까?』하였다. 그 말을 들으니까 당장 자신의 무식이 아차하고 뉘우쳐져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더라는 것이다.
이만큼 춘곡은 그 당시 서양화에 대해 무식하였으므로 이 창피를 면하려고 일층 분발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여름방학 때 이상스럽게 보이는 유화구 상자를 옆에 끼거나 물고 다니면 그게 무엇이냐, 엿장수관이냐, 떡판이냐 하면서 놀리기가 일쑤였고, 채색을 까는 것을 보고 닭똥을 짠다고 떠들어대기도 했다. 도대체 유화를 그리는 기구를 본 일이 없으니까 그럴만도 하였지만 유화를 보고 그것도 그림이냐 진작 쓸데없는 짓 그만하고 서울로 나오라고 하는데는 질색이었다.
그러나 이런 조롱을 무릅쓰고 5년 동안 열심히 공부를 끝내고 서울에 돌아온 것이 스물아홉살 되던 1913년이었다. 졸업작품으로 그린『자매』라는 50호짜리 큰 유화를 가지고 나왔는데, 당시의 매일신보는 이 그림과 조선 최초로 서양화를 배우고 나온 춘곡의 사진과 기사를 크게 보도하여 그를 환영하였다. 유화『자매』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였다.
서울에 돌아와 보니 화단이란 것은 물론 없었고 심전·소림에 이어 관재 이도영이 동양화의 중진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이도영은 춘곡이 일본에 가기 전 심전·소림의 문하에 있을 때 같이 공부했던터라 잘 알고 있었고, 심전·소림 두 대가는 이도영을 자기들의 후계라고 극진히 사랑하였다.
춘곡은 우선 관재를 만나 의논한 뒤 양재를 앞세워 서화인을 규합해 근대적 의미의 화단을 꾸며보려고 하였다. 다행히 여러 사람이 호응하고 춘곡을 격려하였으므로 심전 안중식을 회장으로 하는 서화협회를 조직 할 수 있었다. 1918년 봄 아숙원에서 역사적인 발회식을 가졌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단체고, 총무는 춘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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