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4)-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27)보호조약의 전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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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는 11월l7일이 다가오고 있었다.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보호조약에 대해서 한마디도 비치지 않았다. 그날도 고희동은 급히 정리해야할 문서가 있어 밤을 새우다시피 하고 새벽이 되어서야 퇴근하게 되었다. 이날밤 야단이 나서 수옥헌에서 외부대신 박제순이 참정대신 한규설을 대신해 보호조약문서에 외부대신 관인을 찍었다.
보호조약체결을 결사 반대하는 한규설을 명석 헌병대위가 협실에 감금해 놓고 전간통역관을 시켜 외부관아에 달려가 관인을 뺏어 가지고 수옥헌으로 돌아와 외부대신에게 강제로 찍으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18일 상오l시였다.
고희동은 수옥헌에서 일어난 이 소동을 짐작하고 침통한 기분으로 궁내부를 나와 대한문으로 향하는 도중에 내직실을 지나게 되었다. 내직실이란 궁 속에 있는 숙직실이어서 숙직원들이 밤새고 궁 안을 돌아다니면서 무슨 일이 있나 없나를 순찰하게 돼있었다.
고희동은 지난밤 일이 궁금해 숙직실을 들여다보니 모두들 세상 모르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방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져져있는『궁중일기』를 집어 17일자의 기사란을 보니 커다랗게 내갈긴 글씨로 늘 쓰는 네글자, 『궁중무학』가 쓰여져 있었다.
궁중무사! 고희동은 아연실색해 이 네글자를 바라보았다. 나라가 망했는데도 궁중무사란 말인가!
입직주사란 사람은 대체 무엇을 어떻게 알고 궁중무사라고 썼는가. 밤중에 일본헌병 대위가 거느리는 일본법정 대부대가 궁중에 들어왔고, 이등을 비롯한 장곡천, 임권조, 그밖에 통역관·서기관·보좌관 등 많은 공관원들이 분주하게 뛰어다녔는데도 궁중이 무사했다니 대체 입직주사는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고희동은 통곡하고 싶은 심정으로 내직실을 나와 집으로 향하였다.
그 뒤로 궁내부 출근을 집어치우고 집에 틀어박혀 있었다. 외국인 고문관 기술자들은 일이 없어졌으니 본국으로 돌아갈 것이고 따라서 고희동의 할 일도 없어졌다.
「마탤」은 금광일이 남아있으므로 그대로 얼맛동안 한국에 머물러있기로 되었고, 「레미옹」과 많은 동료들은 즉각 본국으로 돌아갔다.
「레미옹」은 작열하는 파티에서 고희동을 붙들고 그림공부를 하러 파리로 오라고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고희동은 얼맛동안 집에 틀어 박혔다가 친구들한테 끌려 술타령도 하였다. 마침내 그는 그림을 배울 결심을 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가 21세였다.
「레미옹」이 그리는 서양화는 흥미는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생소한 그림이었다. 그러나 서양화를 배우려도 우선 우리나라의 재래식 그림에 눈을 떠야하므로 중국화보를 사다 붓으로 흉내내기 시작하였다.
그때 우리나라의 화가로서 이름 높은 사람에 두 사람이 있었다.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이었다. 소림은 집이 종로 청계천 건너에 있는 갓우물골(입정동)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어졌지만 청계천3가 부근이었을 것이다.
그는 비록 집은 보잘 것 없는 작은 집이었지만 일정한 주소가 있어서 그림을 배우려고 오는 젊은 사람을 착실히 지도해 주었다. 그러나 심전은 일정한 집이 없었다. 동가숙 서가식으로 아무데서나 자고 아무데서나 얻어먹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제자를 지도하였다. 옛날 화가들은 대체로 이러하였다. 오원 장승업도 그랬고 최칠칠도 그랬다.
춘곡 고희동은 가까스로 심전 있는데를 찾아서 그에게 입문하는 인사를 하였고, 소림은 집이 가까우므로 자주 다니면서 그의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이렇게 2∼3년을 지내다보니 「레미옹」이 그리던 그 그림이 진짜 그림인 것 같이 생각되었다. 그는 서양화로 마음이 차차 쏠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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