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풍성한 수확...한국 스포츠 저력 확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2면

16일간 로스앤젤레스의 하늘을 밝히던 성화가 꺼지고 촌각을 다투던 취재전쟁도 막을 내렸다. 올림픽사상 최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했고 최대의 메달획득을 한 LA 올림픽에는 또한 최대규모의 기자단이 취재전선을 뛰었다. 기사로 전달하지 못했던 인류제전의 뒷이야기, 우리 선수단에 얽힌 화제, LA올림픽이 준 교훈과 문제점등을 본사 올림픽취재진의 방담으로 엮어본다.
-고생들 많았습니다. 경기개막 14일 전에 현지에 도착, 지금까지 자동차로 뛴 거리가 1만 2천 마일입니다. 그리스에서 성화가 달려온 9천마일(1만5천km) 보다 3천 마일을 더 뛴 셈이지요. 그래도 메달이 쏟아져 피로를 덜 느꼈습니다.
-경기시작 4일째 되던 날 첫 금메달이 레슬링에서 나왔지요 .운동장을 다닌 지 10년에 대소승부를 수없이 보았지만 김원기 선수가 매트에 오르는 순간 손에 땀이 촉촉히 젖어 들더군요.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하는데, 드디어 애국가가 울리고 태극기가 오르는구나 생각하니 입에서 단내가 나요.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금연이고…. 그러다 김선수가 딱 상대편과 맞서니까 손에 땀도 사라지고 기자본업의 정신으로 돌아가더군요.
-현장에서 가장 냉정하고 침착한 게 기자라지만 「세계무대 에서의 꿈」은 확실히 피가 거꾸로 솟게 하는 흥분제예요.
점수가 3대 3 동점에 김선수의 큰 기술이 우세승이었어요. 금메달을 확인하는 김선수의 손이 번쩍 올랐는데 뭘로 이겼는지, 왜 이겼는지 정신이 얼떨떨하더군요.
-태극기가 제일 높이 오르고 누가 시키지도 않은 애국가가 교민응원석에서 합창될 때 어찌나 콧날이 시큰한지 창피한 줄 모르고 기자신분에 취재할 것도 잊고 눈물을 흘렸으니까요. 「태평양 건너 십 수년을 떨어져 살았다 해도 질긴 밧줄이 한 동포로 묶는 순간이었습니다.

<애국가에 찡하고>
-김원기 선수도 그렇지만 유도의 안병근 선수도 당초 예상 안 했던 금메달이었어요. 「의외의 결과」가 생길 때 취재진은 몇 배 바빠집니다. 중앙일보 LA지사 특별취재반 전용 방의 경기상황판은 가장 완벽한 것이었습니다.
선수개인별 성적예상·상대선수의 전력 등등이 종합적으로 수록되어 이를 기본으로 다음 날의 취재우선순위를 정하거든요. 그런데 초장부터 엉뚱하게 빗나가 온통 초비상이 걸렸었지요.
-왜냐하면 26개 경기장이 가까운 데는 서울시청에서 잠실정도지만 제일 먼 곳은 서울∼대전정도 떨어져있기 때문에 A경기장에서 삐삐(무전) 연락을 받고 B경기장으로 오가려면 기가 막힐 노릇이지요.
-레슬링 장에서 하형주 선수의 금메달권 진입연락을 받고 고속도로를 시속 1백20km로 달리다 펑크가 나는 바람에 LA 취재기자단 순직 금메달이 되는구나 각오한 적도 있어요. -세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하형주 선수는 출전 전에 이미 가슴속에 금메달을 안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김선수가 금메달을 따 가지고 선수촌에 들어가자 하선수는 벌렁 누워 천장을 응시하며 『네가 김원기냐? 기자들이 뭘 물어보더냐? 만일 내가 시상대에서 울면 사진 기자들이 좋아할 것 같더냐』는둥 질문을 했다는 겁니다.
막상 금을 딴 하선수는 시상대에서 늠름한 자세로 환호하는 관중들에게 두 손을 번쩍 들어 멋진 답례를 해 울지 않아도 좋은 사진이 잡혔습니다.
-9일 하형주 선수가 금메달을 따던 날은 금·은·동 8개(은 확보3)가 쏟아져 한국스포츠사상 최고의 날이었지요. 이번 한국선수단의 총평을 해보지요.
-권투의 쿠바, 레슬링의 소련· 불가리아, 유도의 동독등 공산권의 불참을 감안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기종목을 경쟁종목으로 정하고 5백일 강훈을 했고, 경기단체장들이 대기업회장중심으로 바뀌면서 전지훈련·국제대회출전·원정경기등 재정적 뒷받침 밑에 훈련·지원을 아끼지 않은 게 결실을 맺었다고 보아야지요.
-「투자는 결실과 비례한다』는 건 이번 올림픽에서 입증됐습니다. 선수들은 그들대로 88올림픽 주최국으로 명예가 달렸다는 사명감에 불탔고 메달을 따면 응분의 보수가 주어진다는 복합적 요소도 작용했다고 봅니다. 김성집 단장은 각 종목의 감독을 젊은 사람으로 과감히 교체한 것이 패기나 선수들과의 적의없는 인간적 조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고 보더군요.
-투기종목 못지 않게 구기에서 여자농구와 여자핸드볼이 은메달을 획득한 것은 값진 성과였습니다. 특히 비인기종목으로 그늘에 가려 있던 여자핸드볼의 세계 2위는 반드시 기억해야 할 LA올림픽의 쾌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매스컴이나 경기단체에서 꼽던 메달리스트들이 탈락하고 의외의 선수가 금을 따낸 데 대해 「돌변」이라든가 체육회의 「자가진단잘못」으로 봅니다만 그건 조금 잘못된 판단인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유도에서 김재엽 선수가 세계적 수준으로 금메달감이다 하면 그런 선수가 있음으로 해서 다른 선수의 수준도 그만큼 금메달에 육박해있다는 겁니다. 누구나가 금메달에 도전할 자격이 있는 거지요.
누가 메달을 따고 누구는 못 땄다 따질게 아니라 애당초 꼽았던 유도·레슬링·복싱·양궁에서 다 메달이 나왔다면 사람만 바뀌었지 전체적인 계획은 맞아떨어진 것으로 보아야지요. 그것이 스포츠의 속성입니다. 사람은 달라도 결국 예상했던 종목에서 메달이 나온 겁니다.
-그런데 올림픽때마다 느끼는 겁니다만 금은 역시 메인 스타디움에서 따야 더욱 값지다는 생각이 들어요. 육상 종목에서 금이 나와야한다는 겁니다.
뒤집어 말하면 육상에서 금을 따는 나라는 다른 종목에서도 다수확을 한다는 겁니다. 다리가 강하고 심장이 튼튼해야 뭐든지 잘 합니다. 1만여명 안팎의 관중 앞에 태극기가 오르는 것보다는 10만여명 앞에 애국가가 울리는 게 한층 장쾌하지요.

<구기 은메달 쾌거>
-그래서 『금이면 다 금이냐』하는 소리가 있습니다. 우리 체육계가 이걸 알아야 해요. 아직은 뿌리가 얕으니까 당장의 소득을 위해 구기종목에 집중하지만 역시 육상이 약하니까 올림픽때마다 불안에 떨고 노심초사하는 겁니다. 기록경기는 예측이 정확하지만 구기는 아무리 자신이 있어도 심판의 재량이라는 게 늘 작용하거든요.
국민이 육상을 사람하고 육상을 하면 밥을 먹고 살 수 있는 풍토가 되어야 합니다. 미국의 육상 영웅「칼·루이스」나 「에드윈·모제스」의 연간수입이 3백만 달러를 넘어요. 좋은 육상선수가 나올 토양이 조성되어야 합니다.
-심판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복싱경기는 역대 올림픽중 가장 말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낙제점이었어요.
12체급 전체의 석권을 노리다가 결국 금메달7개를 따낸 미국 복싱팀이 목적달성을 위해 보이지 않는 손으로 경기마다 승부에 영향을 미쳤다는 비난이 각국 복싱관계자들 사이에 공공연히 터져 나왔으니까요.
-한국팀이 맨 처음 과감하게 미국팀을 상대로 비난을 퍼붓자 그동안 당하기만 하던 각국 복싱팀이 벌떼처럼 들고일어나 미국에 대한 의혹 짙은 판정을 비판하고 나셨지요.
-그 「보이지 않는 손」이 미국 프로권투계를 잡고있는 거물 프러모터들이라는 게 정설입니다. 제 2의 「레너드」로 꼽히고 있는「마크·브릴랜드」같은 선수는 1백만 달러 정도가 투자되고 있다는 거예요.
흥행사들은 항상 새 상품 (신인프로복서)을 찾고있고 가장 좋은 시장이 올림픽대회지요. 그들이 금메달을 따야 프로 세계에서 값을 올리거든요. 이번 LA올림픽의 복싱판정을 둘러싼 난장판을 전문가들은 「미국의 스캔들」로 규정짓고 있습니다.
-공산권이 불참한 LA 올림픽에서 기록경신이 다소 저조한 감이 있었어요. 수영을 제외한 사격·역도·육상 등에서는 세계 신기록이 거의 없었어요.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체조에서는 10점 만점이 쏟아졌지요.
-체조에서 10점 만점이 쏟아진 것은 이번 올림픽에서 체조의 수준이 급격히 향상되었다기보다는 심판들의 판정기준이 낮아지고 체조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공산권에 대한 반발심도 작용되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주최국인 미국은 공산권의 불참에 대해 무척 신경을 쓰는 것이 역력했습니다.
루마니아와 중공에 대한 미국의 매스컴보도도 그렇고 조직위의 프레스릴리즈에서도 항상 주서를 달아 『이 기록은 동구권의 불참으로 얻어진 금메달이 아니다」라고 명시한 것이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체조선 만점 남발>
이번 올림픽은 완전히 미국의 잔치였지요. 마치 미국국내대회에 각국이 우정 출연한 꼴이 되었다고나 할까요. 더우기 신문·방송도 미국일색이어서 각국들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지요. 이런 면에서는 미국의 대국주의가 지나쳤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폐막 하루 전 신준섭 선수가 따낸 금메달은 정말 멋진 드라마였습니다. 오전에 거행된 다섯 개의 체급 중 미국이 4개의 금메달을 휩쓸고 마지막 다섯번째에서 한국이 미국 복싱의 코를 납작하게 했거든요. 우리 모두 얼싸안고 춤을 추었지요.
-그러나 우리들의 열기는 곧바로 분노로 변했습니다. 자기네들이 이기는 경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중계를 하던 ABC TV가 야멸차게도 우리의 수상장면은 도마뱀 꼬리 끊듯 싹 자르고 상업광고와 육상경기장으로 화면을 돌리는 거예요.
사무실에 있던 취재진들은 곧 애국가가 울릴 것으로 알고 일손을 놓고 전원 기립해 있었지요. 우리뿐만 아니라 LA지사직원 전원이 부동자세를 취했다가 엉 뚱한 장면으로 돌리는 바람에 동시에 『개××들』소리를 외쳤습니다.
아량도 없고 다음 올림픽개최 국가에 대한 예의도 차릴 줄 모르는 추악한 쇼비니즘의 순간이었어요. 기가 막혔습니다.
-중앙일보LA지사에는 곧바로 ABC를 규탄하는 전화가 빗발쳤지요. 그러니 ABC엔들 조용했겠어요. 경기종료 40분쯤 지나 ABC는 신의 시상식장면을 뒤늦게 방영하더군요. 하여튼 고약한 심보예요 .태극기가 오르고 애국가가 연주되는 금메달시상식 장면이 TV에 처음 방영되는 순간이었지요. 분노가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어요.
-경기장마다 관중들이 거의 매일 만원사례인데다 그 종목에 대한 규칙은 물론, 선수들의 수준까지도 자세히 알아 잘못된 심판에 대한 야유가 많았어요.
-한국에서는 파리만 날리는 육상·수영·체조등 기본 종목이 이곳에서는 가장 큰 인기를 끌고있으며 경기장마다 관중이 만원인 데는 놀랐습니다 .특히 10만명을 수용하는 메인 스타디움의 육상경기장이 매일 가득 찬 것이라든지 수영과 체조를 보기 위해 아침7시부터 줄을 서는 모습은 정말 부러웠어요. 88 서울올림픽에서 서울관중의 반응이 궁금해요 우리 국민들의 스포츠지식을 높이는데 우리 언론이 한몫을 단단히 해 야할 것 같습니다.
-하계올림픽에 처음으로 참가한 중공의 선풍도 대단했습니다. 중공에 대한 미국인들의 호감도 작용했지만 중공스포츠가 그동안 무서울 이만큼 급성장했음을 보여주었지요.

<육상 뒷받침 절실>
이번 올림픽기간중 이곳 교민들의 열렬한 응원도 한국선수단의 좋은 전과에 큰 몫을 차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초 기대했던 교민단체의 조직적인 동원이나 응원은 실패한 것 같습니다.
-이번 올림픽취재의 특징은 언론사상 처음으로 각 신문사가 독자적인 취재팀을 보냈던 거지요. 그 전에는 한 사에서 1명씩 보내 공동취재를 했지요. LA의 취재경쟁은 전쟁이라 할 만했어요.
-취재기자를 가장 많이 골탕먹이고 우리의 출장비를 위협한 LA올림픽조직위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지요.
-상업주의 올림픽 운영이란 건 이미 알려진 거지만 지나치게 장삿속이더군요. 50달러 짜리 호텔 방이 98달러, 8시간 전세 택시 값이 l백달러에서 2백달러, 한 통화에 15센트 하던 공중전화가 20센트로 올랐어요.
-무엇보다 LA올림픽조직위원회가 ID카드(보도증)발급을 제한하는 바람에 경기장 취재를 못 해 애간장이 탔지요.
우리 취재반의 경우 취재·사진기자 합해 5장밖에 발급하지 않았잖아요. 나머지 기자들은 암표사서 취재해야 했는데 어디 쉽게 구할 수나 있었나요.
하루에 7∼8군데서 경기가 있을 때는 미칠 지경입니다. 어떤 때는 16달러 짜리 입장권을 50달러를 주고 암표를 사서 관중석에 앉아 취재를 해야했습니다.
-시차때문에 서울의 3판 마감시간이면 LA는 새벽2시입니다. LA올림픽조직위에서 잡아준 호텔이 오산쯤 떨어져 있어요. 곱게 자는 사람이 없더군요.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자요. 날 밝는 게 그처럼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회사에서 투자한 출장비가 1억여원, 또 국제전화료·전용회선·사진전송료·팩시밀리 송료가 천문학적 숫자가 될 거예요.

<중공 성장 경계를>
그동안 송고한 사진의 수신인화지 길이가 4백m로 LA올림픽의 주경기장인 메모리얼 콜리시엄 메인 스타디움 트랙한바퀴가 되고 2백자 원고지만3천장이 되는 분량의 기사를 보냈습니다.
-돈도 많이 쓰고 기사도 많이 썼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중앙일보가 한국언론사상 최초의 뉴스컬러를 시작하면서 그 첫 회에 한국의 첫금메달 소식을, 그리고 그 기회를 우리 특별취재팀이 차지했다는데 큰 보람과 긍지를 느낍니다. 메달을 딸 때마다 컬러판을 한다는 본사 메시지를 받고는 우리모두 『몸이 부서져도 좋다, 메달만 따다오-』라는 조크가 통했으니까요.
-마지막 주말(한국시간으론 일요일)의 감격은 영원히 잊지 못할 겁니다. 처음부터 이 날을 「금메달의 날」로 기대했지만 하루에 금3개, 모두 6개의 메달이 쏟아질 줄이야…. 특히 이 날 유인탁선수가 부상의 고통을 이기고 부축을 받으며 시상대에 올라 고통 반, 감격 반의 눈물을 흘리는 장면에는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기자들도 대부분 울먹였으니까요.
-아슬아슬했던 양궁경기에서의 역전승도 감동적이었어요. 서향순 선수가 그렇게 예쁠 수가 없어요 .달려가서 안아주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우리 나라가 지금까지 9번의 올림픽대회에 출전했는데 8번까지의 메달획득수가 금1,은 6, 동 11개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한번에 금 6, 은 6 ,동 7개가 쏟아졌으니 이건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7번 출전해서 얻은 것의 6배를 한번에 따냈으니 얼떨떨할 정도입니다. 한밤중과 새벽의 허기를 달래준 컵라면에 감사를 드려야겠습니다. 총 소비량이 8박스나 되었죠.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