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금」이다"…더위씻은 쾌보|유도 하형주 올림픽 정상에 서던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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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부처님 우리 막내를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형주선수의 목에 금메달이 걸려지는 순간 하선수의 홀어머니 권현순씨(50)는 염주를 꼭 잡은채 기도를 올렸다.
『유도에서 첫 금메달이 나온 7일 이후 거의 매일 밤을 뜬눈으로 새웠심뎌. 만약 우리 형주가 금을 못따면 무슨 면목으로 국민들 앞에 서겠습니꺼. 매일 새벽3시면 절에 가서 부처님께 빌고 또 빌었심뎌』
하선수집(부산시당리동신동아맨션아파트l동304호) 현관에는 이웃 아주머니들의 신발과 축하 화분으로 발들여 놓을 틈도 없었다.
발길이가 33cm 돼「왕발」이란 별명을 갖고 있는 하선수는 평주 대아중 3년때 유도를 시작했다.
당시 담임교사 권원호씨(46)는『하선수가 학업성적도 뛰어나 인문계고교로 진학하려 했었으나 운동선수로 대성할 재목이어서 진주상고에 진학하도록 권했다』고 했다.
하선수는 진주상고에서 씨름부에 들어갔으나 적성이 맞지 않았고 마침 부산체육고에서 스카웃, 「유도수업」을 위해 어머니와 함께 부산 누나집으로 아예 주거를 옮겨버렸다.
『형주가 금메달을 딴 것은 본인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우리 장모님과 왕년의 국가대표 유도선수였던 나삼현·조재기교수(동아대)의 극성스런 뒷바라지가 한몫을 했읍니다』하선수의 매형 이위상씨(34·한국중공업사원)는 처남을 돌바준 두 지도자에게 영광을 돌렸다.
친척아저씨 정삼현교수(당시 동아대유도코치)가 겨울방학 때 고향 진주에 들렀다가 기골이 장대한 하선수를 본 뒤 유도를 하도록 했고 계속지도를 해왔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몸집이 컸던 하선수를 만난 정교수는 자신과 너무 닮은 하군에게 단도직입적으로 『유도를 배우라』고 권하고 유도복 한벌을 주었다. 그 해 겨울부터 극동체육관에서 낙법을 배우기 시작한 하선수는 2개월 후에는 상대할 선수가 없을 정도로「무서운 아이」로 성장했다. 정교수는 하군을 부산체육고에 입학시켜 자신이 직접 지도에 나섰다.
『형주를 낳기 한달전쯤 꿈에 시어머니를 만났심더. 시어머니께서 저 보고 하는 말씀이 우리집안에 세계를 누빌 장사가 나온다고 합디더. 더우기 형주가 일본선수「미하라」를 냅다꼬져 이긴 것은 정말 시원합디더』
성균관대 약대를 나와 진주에서 약국(보민약국)을 경영하던 아버지 하종진씨(당시40세) 는 하선수가 평주 천전국교 3년때 병으로 돌아가셨다.
하선수의 어머니는 담배가게를 시작, 2남2녀를 열심히 키워 큰 어려움은 없었다고 했다.
『운동 때문에 막내동이를 혼자 객지에 보내는 것이 너무 안타까와 큰 아들과 작은 딸은 평주에 남겨놓고 부산으로 이사를 했지예』
지고한 모정에 못지 않게 하선수의 효성도 소문나 있다.
태능선수촌에 입촌한후 l주일에 꼭 한번씩 시외전화를 걸어 어머니의 안부를 묻고 잡비가 생기면 꼬박꼬박 어머니에게 송금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부산=엄주혁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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