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쑹냉장고·쥐세탁기 … 참 희한한 북한 인기 가전제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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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국가우주개발국(NADA)의 로고.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로고와 유사하다. 한국산 모나미 153 볼펜을 본뜬 평양수지연필공장의 제품, 한국산 소주 참이슬과 흡사한 나선종합식료가공회사의 참대술. 오른쪽은 삼성냉장고와 LG세탁기의 상표 일부를 제거한 모습을 보여주는 그래픽. [사진=중앙포토, 조선중앙통신]

기온이 부쩍 올라간 요즘 평양 고위층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는 가전 제품이 ‘쑹 냉장고’입니다. 이름만으로는 중국 제품인걸로 착각할 수 있지만 뜻밖에 한국산이라고 합니다. 삼성의 영문글자 중 ‘SAM’을 지우고 ‘SUNG’만 남겨 ‘쑹 냉장고’로 부른다는 겁니다. ‘쥐 세탁기’의 인기도 만만치 않다고 합니다. LG제품에서 ‘L’자를 떼어내니 ‘쥐(G) 세탁기’가 되는 거죠.

 이처럼 글자 일부를 지워 암호처럼 부르는 건 한국 브랜드의 가전제품을 쓰는 게 금기시되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선 권력 핵심계층이거나 상당한 재력이 있는 경우엔 주로 최신 제품을, 그렇지 않은 경우는 중고품을 구입한다고 합니다. 북한과 마주한 중국 단둥(丹東)이나 옌지(延吉)시에는 중고품을 손질해 쑹냉장고 혹은 쥐 세탁기로 둔갑시킨 뒤 북한 업자에게 넘기는 전문업체가 성업 중이라는군요. 설사 단속에 걸려도 “중국산인줄 알았다”고 하면 처벌이 쉽지 않다는거죠. 중국산 냉장고에 한국 브랜드를 붙여파는 경우도 있다고하니 인기를 실감케합니다.

 북한 특권층의 각별한 한국 가전제품 사랑은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의 경우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2002년 가을 경제시찰단을 이끌고 서울에 온 그는 한 가전제품 생산라인에서 김치냉장고에 눈독을 들였는데요. 우리 정부 당국은 판문점을 통해 김치냉장고를 선물로 북송해줬습니다. 장성택·김경희(당비서) 부부는 김치를 감칠맛나게 익혀내는 기술력에 감탄했을지 모릅니다. 장성택이 반국가행위 혐의로 2013년 말 처형된 데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을 수 있다고 봅니다.

 북한의 신흥부유층이 한국산 ‘쿠쿠밥솥’을 애용한다는 국가정보원의 첩보도 나왔는데요. 어떤 점이 북녘 주부의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했습니다. 대북 소식통에게 물어보니 “질이 떨어지는 북한 쌀을 압력솥에서 지어내면 찰진 맛을 내기 때문이기도하지만 인기를 끄는 진짜비결은 따로 있다”고 귀띔했습니다. 밥솥이 스스로 알아서 우리 말로 이런저런 조리상황을 알려주는 기능에 환호하다시피 한다는 겁니다. 압력이 세게 뿜어져 나올때 ‘조심하라’ 말해주고, 밥이 다되면 ‘취사 완료’라고 알려주는 걸 무척 신기해한다는 거죠. 사정이 이렇다보니 고위층 사모님과 며느리들 사이에선 “쿠쿠밥솥 하나 없으면 사람 취급 못받는다”며 웃돈을 주고 최신모델을 구하려 난리랍니다.

 한때 북한에선 혼수품으로 ‘5장6기’가 꼽혔는데요. 인체의 5장6부처럼 살림에 필요한 필수품이란 의미로 이불장·양복장·식장(찬장)·책장·신발장 등 5장과 TV·냉동기(냉장고)·세탁기·재봉기·선풍기·녹음기 등 6기를 일컬은겁니다. 요즘 추세라면 한국산 브랜드로 6기가 속속 채워질거란 생각이 듭니다.

 ‘K-뷰티’바람을 일으키며 세계를 뒤흔든 우리 화장품도 북한 여성을 매료시키고 있습니다. TV아나운서나 인민배우·공훈가수 등이 ‘조선사람 피부에 잘맞는다’며 한국산 화장품 입소문을 내고 있다는 얘기도 들립니다. 향수의 경우는 명품브랜드인 불가리 제품이 최고 유행이라고하는데 기초화장품이나 색조 분야는 한국 제품을 선호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국방위 제1위원장의 부인 이설주도 예외는 아니라고 합니다. 소식통은 “개성공단에서 의류 브랜드가 무더기로 도난당하는 것도 중국산 제품에 한국 상표를부착해 암시장에 유통하려는 것과 관련된 것”이라고 전합니다. 국정원에 따르면 한국산 제품에 관심을 가질 정도의 신흥부유층은 북한 인구의 상위 1%인 24만 명이라고 합니다. 4인 가구를 기준으로 볼때 6만 명의 당·정·군 핵심 간부 및 그 가족을 의미하는 셈입니다.

 반면 만성적 경제난으로 국가 배급망이 무너지자 일반 주민들은 장마당에 지탱해 생존해왔습니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장마당이란 호랑이 등에 주민들은 물론 일부 특권층도 속속 올라타고 있는데, 김정은만 실정을 모른다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 흘러나온다”고 전했습니다.

 북한은 ‘짝퉁의 나라’란 오명을 쓴지 오래됐습니다. 가짜 담배나 초정밀 위조달러인 슈퍼노트까지 위조해 국제 암시장에 유통시켜 골칫거리였는데요. 이젠 핵심 부유층이 나서 한국산 상품을 탐하고, 장마당에선 해외 유명브랜드나 캐릭터를 베낀 가짜 상품을 유통하는데 빠져들고 있습니다. 이런 움직임은 김정은 체제들어 본격화하는 것 같습니다. 소주나 볼펜 등 주민이 애용하는 상품 상당수가 한국 제품의 디자인을 그대로 베낀 경우도 드러납니다. 김 제1위원장이 직접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며 제동을 걸고나서기도했는데요. 예뻐지고 부를 과시하고 싶어하는 주민들의 마음을 돌려세우기는 너무 늦은 듯 합니다. 

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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