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기 어제와 오늘|10년을 하루같이「외곬훈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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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10년을 하루같이 매트에 나뒹굴며 훈련에만 몰두해온 김원기(22·상무)의「매트인생」또한 혹독한 시련의 연속이었다.
『십년 마일검한 의지의 승리였어요. 무서운 집념이었으니까요.』
진흙더미에서 주워낸 모난돌을 정성들여 갈고 닦아 오늘의 김원기를 있게 한 최경수(39·현전남체육고교사) 코치가 목이 메이면서 토해낸 첫마디였다.
애나하임 컨벤션센터의 한모퉁이에서 자신의 손으로 다듬어진 돌한개가 옥석임이 증명되는 순간 최교사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감격해했다.
지난77년 전남함평농고에 체육교사로 부임, 레슬링팀을 창단하면서 당시 1년생이었던 김원기와 이번대회에 함께 출전하고 있는 김영남(74kg급) 이연익(68kg급)등 재목들을 길러낸 최교사『그중에서도 원기는 남달리 성실하고 뚝심이 좋아 벌써부터 큰그릇으로 꼽고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오로지 대학진학을 위해 택한 길이 레슬링이었지만 혹독한 훈련은 가혹할 뿐이었다.
새벽훈련·오후훈련·야간훈련등 하루6시간씩의 빈틈없는 훈련일정은 차라리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잘먹지 못해 그런지 체력이 늘 달렸고 귀가해서는 녹초가 되곤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용기 백배, 대학진학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 채찍질해가며 훈련에 몰두했다.
함평농고를 졸업한후 김원기는 80년 전남대체육과에 특기자로 입학했다.
『그때만해도 전남에서 교사자격증을 주는데는 전남대밖에 없었어요. 교사가 되면 살수 있을것같아 택한길이지요』 (김원기의 말)
전남대에 진학해 다시 인연을 맺은 최코치의 스파르타식훈련은 그에게 커다란 자극을 주었다.
평소 흠으로 지적됐던 체력이 보완됐고 유연성·순발력도 몰라보게 좋아지게된 것이다.
순발력을 키우기위해 김원기는 남이 계단뛰기 10번할때 20번씩하는 열의를 보였다고 최교사는 당시를 회고했다.
이때쯤 김원기는 동료들간에 「훈련만 아는 외곬」 으로 불렸다는것.
대학3년때인 82년10월 제63회전국체전은 김원기에겐 뜻깊은 날이었다.
남자일반부62kg급에서 준우승, 국내2인자로 부상한 것이다.
84년봄 졸업과 함께 입대한 상무 (현 국군체육부대)는 김원기에게 레술링선수로서 「매트이산인에 눈을 뜨게한 계기가 됐다.
과학적인 자료분석에 의한 교습법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경철 코치와의 해후도 그에겐 도약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당시 2위권을 맴돌던 그였지만 이코치의 과학적 지도와 자상한 보살핌은 큰 힘으로 작용, 그의 기량은 몰라보게 성장을 거듭할수 있게 됐다.
상대선수의 장·단점을 컴퓨터에 입력, 분석하고 이에맞는 전형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놀라운 성장속도를 보인것이다.
하루 7시간씩 반복되는 강화훈련도 그랬다.
비록 고되기는 했지만 조금도 게으름을 피지 않고 스스로 채찍질, 꿈을 키웠다.
마침내 지난4월 LA올림픽 최종평가전에서 맞수 안대현(한국체대)을 꺾고 대표선수로 복귀하는 행운을 누리게 됐고 LA행 특급열차에 오를수가 있었다.
술·담배는 컨디션조절을 우려, 전혀 입에 대지도 않았다.
특기라면 허리감아넘기기와엉치걸이.
남달리 국제대회에 강한 면도 있어 지난해8월 터키의 야사도구친선대회에서는 2위, 올2월의 메라컵대회에서는 6위를 각각 기록하는 호조를 보이기도 했다는것.
이경철코치는 『한마디로 뚝심있는 레슬러예요. 평소 명랑하기도 하지만 정작 경기에 임해서는 그렇게 진지할수가없어요』 라면서『레슬링선수로는 전형적인 대기만성형 큰그릇』이라고 추켜세웠다.
『88년 서울올림픽에도 출전, 조국에 금메달을 바치겠어요.』
소박하면서도 눈빛이 초롱초롱한 김원기는 『오늘의 기쁨을 내일의 영광으로 삼겠다』 는 각오로 자신을 다지고 있다.【로스앤젤레스=본사 올림픽특별취재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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