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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세대와 정치인 JP…“운동권과 논쟁한 혁명 2인자 … 근대화 열정 보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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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이영일(左), 서진영(右)

1963년 10월에서 64년 6월까지 JP는 ‘캠퍼스의 정치인’이었다. 63년 10월 22일은 이른바 ‘자의반 타의반’으로 떠났던 1차 외유를 끝내고 귀국한 날이다. JP는 ‘혁명과 한·일 회담’의 전도사를 자처했다. ‘쿠데타와 굴욕외교’ 비판의 진원지인 캠퍼스를 찾아다니며 대학생과 토론했다. 권부의 실력자와 학생 운동권의 논쟁은 각 신문이 전면으로 대서특필했다. 당시 학생 운동권에 몸담았던 두 사람의 얘기를 들어봤다.

 ◆이영일(李榮一·76·서울대 정치학과 58학번) 전 의원=“63년 11월 5일 동숭동 문리대 8강의실에 학생들이 1000명쯤 몰려들었다. 혁명 2인자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그는 5·16의 정당성을 설명하면서 ‘민족적 민주주의’ ‘조국 근대화’라는 표현을 썼는데 처음 들어보는 얘기였다. 가슴에 와 닿았다. 그때 운동권 리더였던 김중태(75·정치학과 61학번)는 “워커힐을 만들어 더러운 양키즘을 한강에 둥둥 떠다니게 해놓고 민족적 민주주의란 말이 나오느냐”고 공격했다. JP는 빙긋이 웃으면서 “그렇게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보다 큰 한·미 관계를 위해서 여러 가지 각도로 생각해 결정한 것이다”고 넘어갔다. 학생들은 대체로 JP의 젊음과 여유, 능변(能辯)에서 매력을 느꼈다.”

 ◆서진영(徐鎭英·73·고려대 정외과 61학번) 고려대 명예교수=“JP가 고려대에 두 번 왔던 걸로 기억한다. 경제개발을 하기 위해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혁명의 열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일 회담이 진행되면서 과거사 문제를 충분히 사과받지 않고, 적은 액수로 청구권 자금을 타결하는 등 지나친 양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6·3사태는 한국 현대사를 이끌어 온 두 주역, 즉 민주화·근대화 세력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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