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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일가 잡기 전엔 비즈니스 논하지 말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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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대통령 일가(一家)를 잡기 전엔 비즈니스를 논하지 말라."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족벌주의가 판치고 있다. 최고권력자의 친인척들이 각종 사업의 이권을 독차지하다시피 하면서 '스탄 크로니즘(Stan Cronyism.중앙아시아 정실주의)'에 대한 비판이 고조되고 있다. 고유가 덕분에 '오일달러'가 넘쳐나고 있는 카자흐스탄이 대표적인 경우다.

◆ 카자흐스탄의 '세 자매'=중앙아시아 강국으로 부상하는 카자흐스탄에선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65) 대통령의 세 딸과 형제.조카들이 각종 이권을 거머쥐고, 엄청난 특혜를 누리고 있다.

옛 수도 알마티에선 이집트식(式) 사원을 본떠 만든 초호화 스파 클럽이 성업 중이다. 대통령의 막내딸 알리야(25)가 몇 년 전 이집트 관광지 룩소르를 여행한 뒤 개업한 것이다. 3월 완공된 이 클럽의 실내 벽은 이집트 상형문자로 장식돼 있고, 입구에는 스핑크스 조각상이 서 있다. 이 클럽 건물의 건축을 둘러싸고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 최근 카자흐스탄의 족벌주의를 심층 보도한 뉴욕 타임스는 "이 건물이야말로 카자흐스탄의 정경 유착을 말해주는 대표적 사례"라고 지적했다.

알리야는 1998년 이웃 나라인 키르기스스탄의 아스카르 아가예프 전 대통령의 장남과 결혼했다 1년 만에 이혼하고 귀국했다. 그 후 각종 건설 공사에 '취미'를 붙였다. 모스크바의 한 컨설팅업체는 "알리야는 자신이 소유한 '엘리트스토로이'라는 건설업체를 통해 정부 발주 공사는 물론 민간 기업의 대형 프로젝트까지 개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연 100억 달러 넘게 들어오는 오일달러 덕에 카자흐스탄은 철도.지하철.고속도로.발전소 등 각종 인프라 건설에 매년 수십억 달러를 쏟아붓고 있다.

나자르바예프의 둘째딸 디나라는 석유 사업이 전문이다. 하루 129만 배럴인 카자흐스탄의 산유량은 10년 내 300만 배럴 이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이에 따라 엑손 모빌.셰브론 등 서방의 석유 메이저들이 각축을 벌이고 있다. 추정 매장량이 각각 250억 배럴, 600억 배럴인 텡기즈와 카샤간 유전이 속속 개발되고 있다. 디나라의 남편이 부사장을 맡았던 카즈무나이가스 그룹은 석유 관련 사업에 관한 각종 인.허가권을 갖고 있다. 올 가을 국영 석유회사 페트로카자흐스탄의 캐나다 측 지분을 중국 석유업체에 넘기는 데 디나라가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소문이 돈다.

41세인 큰딸 다리가는 무소불위의 정치권력을 행사하고 있다. 그는 카자흐스탄 최대의 미디어 그룹인 카바르(제1공영방송)의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지난해 국회에 진출, 부친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거론된다.

◆ 주변국도 비슷한 사정=카스피해 연안의 다른 나라도 사정은 비슷하다. 우즈베키스탄에선 5월 안디잔에서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발생했다. 그러나 카리모프는 무력 진압에 나서 700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권력에 대한 도전을 봉쇄하는 데 우즈베크의 정.관.재계를 꽉 잡고 있는 족벌 세력이 큰몫을 한다는 분석이 있다.

아제르바이잔에서는 부자 권력 세습이 이뤄졌다. 일함 알리예프 대통령은 30여 년간 최고 권력자였던 부친의 뒤를 이어 2년 전 대통령에 당선됐다. 알리예프는 서방 자본을 대거 유치, 송유관 건설과 유전 개발에 박차를 가하면서 '석유 왕국'의 틀을 다져가고 있다. 전 세계 천연가스 매장량의 10%를 보유하고 있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대통령은 99년 종신직 대통령에 올랐다. 85년부터 장기집권하면서 그 역시 각종 이권 사업을 친인척 손에 넘겼다는 비판을 듣고 있다.

◆ 장기 집권의 배경=중앙아시아의 집권 세력은 강대국에 대해 ▶안정적인 석유.천연가스 공급 ▶대형 프로젝트 발주▶송유.가스관 건설 등을 대가로 권력 안정을 도모한다. 국민은 흥청거리는 경기 덕택에 정치에 무관심하다.

이양수 국제담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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