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앗, 방청석에 법원장이?" 판사들 떠는 '암행 순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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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 나이 드신 분이 이래도 돼요? 부끄럽지도 않아요?"

이혼소송을 당한 최모(70)씨는 올 7월 법정에서 판사에게 이런 훈계를 들었다. 최씨는 "아내에게 재산을 주지 않으려 부동산을 숨겼다고 판사가 의심하는 것 같았다"며 "판결을 공정하게 하면 되지 면박 줄 이유가 뭐냐"고 불만을 터뜨렸다.

변호사 김모씨는 서울고등법원의 부장판사 A씨가 담당하는 재판에 들어갈 때마다 주눅이 든다. A씨가 재판 중 공공연하게 "그것도 모르느냐"고 무안을 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변호사들 사이에 A씨는 수시로 반말하는 '단골' 판사로 찍혔다"는 게 김 변호사의 설명이다.

대법원이 일선 판사들의 고압적인 재판 진행에 대해 개선 방안을 마련 중이다.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다.

대법원은 이달 초 전국 법원장에게 "법관은 소송 당사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인격적으로 대우해야 한다"며 판사의 법정 언행에 유의해 달라는 지침을 내렸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법원장들에게 "법정에 직접 들어가 권위적인 재판 진행에 대한 개선 방안을 찾아 보라"고 당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법원은 또 서울 시내 일선 법원 등에서 재판 과정을 촬영해 법관의 반말투와 강압적 언행의 문제점을 분석하고 있다.

이홍훈 서울중앙지법원장은 이달 12일부터 일곱 차례나 방청객을 가장해 민사.형사 법정에 들어가 법관들의 법정 언행과 재판 진행 모습을 살펴봤다.

이 과정에서 일부 판사가 이 법원장의 갑작스러운 재판 참석에 당황해 말을 더듬는 등의 해프닝도 발생했다. 특히 일선 판사들은 부적절한 재판 진행으로 인사상 불이익을 당할까봐 긴장하는 눈치다.

서울고법의 한 부장판사는 "권위적 재판 태도가 몸에 밴 판사들이 스스로 반성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홍훈 법원장도 "재판 방청은 법관 평가나 감찰이 아니고 민원인의 눈높이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개선책을 찾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는 "소송 당사자는 판사의 일거수 일투족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며 "재판을 공정하고 부드럽게 진행할 경우 판결에 대한 권위도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하재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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