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휴·대·전·화 네가 없으면 내가 없는 거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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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긴 머리를 싹둑 자를 때? 아니다.
입영 직전 가족들에게 휴대전화를 건네주는 순간이라고 한다.
휴대전화는 곧 '나'이기 때문이다.
휴대전화는 단순한 '전화'가 아니다. 장난감이고, 필수품이고, 또 친구다.
사람들은 휴대전화 알람으로 잠을 깨고, 휴대전화를 충전하며 잠든다.
업계에선 우리 국민 열 중 일곱이 휴대전화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1998년이니
10년도 안 되는 사이에 우리에게 다가와 '의미'가 된 셈이다.
휴대전화는 우리의 삶을 어떻게 바꿔놓았을까.
SK텔레콤이 휴대전화 관련 에피소드를 모아
최근 책으로 펴낸 '현대생활백서'를 통해 들여다봤다.

휴대폰 필수품 시대 … 달라진 풍속도

■ 차 접촉사고
고래고래 고함부터 → 폰카로 촬영부터

■ 사랑의 종말
애인 사진 갈기갈기 → 단축번호 1번에서 퇴출

■ 연애 징크스
덕수궁 돌담길 NO ! → 커플요금제 NO !

# 휴대전화가 바꿔놓은 생활패턴

얼마 전 택시와 접촉사고를 낸 회사원 정모(35)씨. 사고 직후 침착하게 휴대전화를 꺼내 구석구석 사진을 찍었다. 증거자료로 제출하기 위해서다. 그는 "폰카 덕분에 사고 나면 무조건 고함부터 지르던 시대는 지난 것 같다"고 말했다. 강의실.회의실에서도 필기 대신 휴대전화를 꺼내든다. 칠판 내용을 폰카에 담기 위해서다.

휴대전화는 사랑법도 바꿔놓았다. 예전에는 미팅에서 만난 여자가 마음에 들면 전화번호를 냅킨이나 성냥갑에 적어달라고 했지만, 요즘 신세대는 여자의 휴대전화를 낚아챈 뒤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와 통화버튼을 누른다. 소개팅에서 '폭탄'을 만나지 않기 위해 주선자에게 상대방의 동영상 메일을 미리 요청하는 경우도 있다.

애인과 헤어진 다음날. 예전에는 사진을 찢어버렸지만 요즘은 휴대전화 단축번호 1번에서 애인 번호를 지워버린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연인은 헤어지게 된다는 1980년대 연애징크스는 '커플요금제를 하면 꼭 헤어지게 된다'로 바뀌었다. 여자친구와 싸운 뒤엔 빨간 사과를 찍어 컬러메일로 보내고, 다운받은 사랑노래를 배경음악으로 프러포즈를 한다.

기업 인사담당자들에 따르면 입사시험 면접 때 휴대전화에 내려받아 놓은 '진취적인' 노래를 틀어놓고 자기소개를 하는 면접자들도 있다고 한다. 주부들은 마트에서 용량과 가격이 다른 두 제품이 있을 때 바로 휴대전화 계산기 기능으로 뭐가 더 싼지 알아보고, 젊은 처녀들은 받고 싶은 선물 리스트를 애인에게 포토메일로 보내기도 한다.

현대인에게 휴대전화의 침묵은 불안을 야기한다. 주말 내내 한 번도 울리지 않는 휴대전화가 혹시 고장 난 것은 아닐까 하고 집 전화로 걸어본 경험은 한번쯤은 있을 터. 3년차 직장인 백모(27.여)씨는 "깜박 잊고 집에 두고 온 휴대전화가 하루 종일 신경쓰였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부재중 전화가 한 통도 없을 때 허탈하다"고 말했다.

# 디지털에서 찾는 감동

디지털 휴대전화는 아날로그식 '정(情)'도 유용하게 전달한다. '스승의 은혜'노래를 벨소리로 내려받아 놓고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올 때 일제히 버튼을 누르는 것도 새로운 '스승의 날' 풍속도다. "이에 감동받은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사랑한다'는 문자를 단체 메일로 보냈다"는 것이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사연이다.

호랑이 학생주임 선생님이 졸업식 날 제자들에게 보낸 문자도 감동을 준다. '지각쟁이 김**, 너 사회 나가서는 지각하면 안돼' '**야. 행복은 가끔 성적순일 때도 있지만 인생성공은 성적순이 아니다'. 황사가 심한 날 아침 학생들에게 '마스크와 우산 준비'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선생님도 있다.

지난 추석에는 고급 갈비세트 사진을 휴대전화로 찍어 고마운 분들에게 보내는 '디지털 갈비세트'가 유행했다. 모 영화배급사 김모(38) 부장은 "굴비 세트를 찍어 지인들에게 보냈는데 실물이 아니라며 역정을 낸 이는 한 명도 없었다"고 말했다.

도움이 필요한 청각장애인과 문자로 대화를 나누는 '현대판 필담', 주차장에서 미등이 켜져 있는 차를 발견하고 차 주인에게 사진 메일로 알려주는 '주차장 선행',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즉석에서 성금을 보내는 '모바일 온정'은 가슴을 훈훈하게 만든다. 길거리나 지하철 등에서 선행을 베푸는 '천사' 들을 폰카로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경우도 자주 있다.

그래서 휴대전화는 통화기구 이상의 의미가 있다. 새로 산 휴대전화를 떨어뜨렸을 때 마치 자기가 다친 것처럼 가슴 아파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서울대 최인철(심리학과) 교수는 "휴대전화의 다양한 기능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이 주변세계를 통제한다는 느낌을 갖지만, 휴대전화 의존도가 점점 커지면서 역설적으로 휴대전화에 통제받는 결과가 빚어진다"고 말했다.

정현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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