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계약 40%가 "불평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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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한전-벡텔」 사건을 계기로 본 거래실태
최근 문제가 되고있는 「벡텔사의 바가지」사건도 따지고 보면 전형적인 불공정거래행위인 셈이다.
한전의 무지를 이용해 일방적으로 바가지를 씌워오다 뒤늦게 들통이 난것이다.
우리나라의 국제 계약 역사는 불평등 계약으로 점철되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정거래실이 최근 3년동안 처리한 실적만으로도 총 국제계약 건수의 40.5%(4백63건)가 불공정 거래행위에 해당하는 계약 내용을 담고 있었다.
국제계약에서 대표적인 불평등 케이스는 정유회사와 비료회사들이다.
미국의 비료회사 아그리코사와 합작 설립했던 남해화학의 경우-.
지난 78년에 1천9백만 달러를 투자했던 아그리코사와의 계약내용은 그야말로 불평등 계약의 전형이다.
우선 남해화학이 이익을 남기든 손해를 보든간에 무조건 투자액의 20%에 해당하는 돈을 매년 아그리코사가 가져가고 이익금이 남을 경우는 투자지분인 25%에 해당하는 배당금을 우선적으로 챙기도록 되어있다.
생산되는 비료는 한국정부가 무조건 사줘야한다.
계약기간은 회사가 존속하는 한 「영원히」다.
땅 짚고 헤엄치기식의 강사를 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최근의 비료산업 합리화 과정에서 아그리코사의 양해를 얻어 이같은 불평등 계약조건 등의 시효를 「영원히」에서 「오는 87년까지」로 고쳤다.
계약 당시 우리측 대표단에서 먼저 『당신들이 원하는대로 계약서를 만들자』고 제의했고 이에 대해 아그리코사는 『글자 한자라도 고치면 안하겠다』는 조건을 붙여 준비된 계약서를 내놓았다는 이야기다.
가장 알짜 재미를 본 합작기업은 유공의 경영권을 장악했던 걸프사로 꼽힌다.
3천만달러를 투자해 10년만에 떠날때는 9천2백만 달러를 받고 소유주식을 팔아 넘겼다.
투자금액의 3O%를 보장이익금으로 챙긴것은 물론이고 매년 투자금액 이상의 이익을 올렸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이야기다.
이처럼 극단적인 불평등 계약사례는 최근 들어 크게 줄어들었으나 아직도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남아있다.
특히 기술도입 계약이 늘어나면서 갖가지 까다롭고 불리한 조건을 붙여온다.
가장 자주 일어나는 케이스가 기술제공을 조건으로 수출을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 제너럴 푸드사로부터 스낵류 제조기술을 도입한 D사는 『한국에서만 판매해야하며 D사가 만약 기술을 개량한 경우는 이것을 제너럴 푸드사에 공짜로 알려줘야 한다』는 불평등 계약에 응해야했다.
K사는 미국 OSM컴퓨터사로부터 퍼스널 컴퓨터 관계기술을 제공받으면서 미국·일본·동남아시아·아프리카 지역에만 수출하겠다고 약속했고 만약 서로 경쟁이 될 경우 이쪽이 물러선다는 내용도 계약서에 포함됐다.
S사의 기술제휴선인 미국의 컨트롤데이터사 역시 관련부품 기술을 제공하는 조건으로 수출할땐 꼭 자기네를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했다.
H사에 냉장고·콤프레서의 기술을 제공키로 한 일본의 동경 삼양전기는 『일본측이 허용하는 나라에만 수출이 가능하며 계약제품과 관련해서 특허권 분쟁같은 말썽이 생기더라도 자기네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못박고 있다.
H사에 진공차단기의 제조기술을 제휴키로 한 히따찌사는 수출지역 제한뿐만 아니라 계약제품의 성능이나 품질을 책임지지 않는다는 「품질보증회피」조항까지 명시해 놓고 있다.
이들 회사들은 그래도 공정거래법이 실시된 이후에 체결된 계약들이라서 좀 나은편이다.
공정거래실측의 시정명령을 구실삼아 일부회사는 문제의 불평등 조항을 삭제했고 나머지도 합작선과 협상을 벌이고있다.
기업들도 최근 들어서는 국제계약의 초기협상 단계에서부터 국내 공정거래법을 끌고 들어가 더 이상은 양보 못하겠다는 식으로 버텨 공정 거래실이 기업들의 바람막이 구실을 해내고 있다.
경영권 문제로 빚어지는 말썽도 적지 않다.
소유주식 비율이 얼마가 되든간에 실질적인 경영은 자기네 마음대로 하겠다는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컨대 주식 소유지분은 20%정도밖에 안되면서 이사회 구성은 전체 임원의 3분의2를 자기 회사측에서 맡도록 한다든가, 자기측 대표가 단 1명이라도 반대하면 일이 성사될 수 없도록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있다.
BOA와 합작한 한미은행이나 최근에 문을 연 힐튼호텔 같은 경우가 대표적인 예다.
그밖에도 기술을 주면서 원료구입은 자기네가 지정하는 회사로부터 해야 한다든가, 차관을 빌려주면서 대주가 돈이 필요할때는 언제든지 상환요구를 할 수 있다든가, 원리금을 상환받을 때 적용하는 통화(달러 또는 엔화 등)는 그때그때 임의로 정했다든가 하는식의 불평등조항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이번 벡델사건을 계기로 표준계약서를 만들어 엄격히 심사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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