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66) 한일회담(265)-기본조약등 조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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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하꾜네(상근)어업회담은 일본개각의 영향으로 당초 합의보다 이틀 늦게 6월5일부터 8일까지 열렸다. 산자수명한 관광지였건만 4일간의 회담중 양측 대표단은 거의 하꼬네관광호텔 바깥구경을 하지못한채 밤낮없이 자국이익확보를 위해 백열전을 벌여야했다.
회담이 시작되자 양측은 또다시 팽팽한 의견대립을 보여 조금도 진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양측 실무자들은 양보해도 별 지장이 없는 문구 하나까지도 상대방에 안지기 위해 버티는 형국이었다.
우리측의 김정태(주인대사역임)최광수 (현주사우디아라비아 대사)오재희(주파키스탄대사) 씨등 실무진들은 어떻게 하든 4·3합의보완을 관철하려 주장했고 「히로세」 (광뇌달부)외무성 아주국참사관등 일측실무진들은 보완은 불가라는 입장을 고집했다.
그래서 우리측은 4·3합의조문화과정에서 자구 하나를 고치자는 일측제의에 대해서도 『일측이 보완에 응하지 않는한 우리도 한 자의 자구수정에도 손댈 생각이 없다』 고 결연한 자세를 보였다.
이에 「히로세」 참사관이 흥분해 격한 어조로 『이런 국제회의가 어디 있느냐』 고 폭언해 최과장이『발언을 취소않는 한 회의에 응할수 없다』 고 퇴장했고 결국「우시바」 차석대표의 사과로 재개되는등 시종 우여곡절의 연속이었다.
이래서 나는 「우시바」대표와 산책을 하면서 『이래서는 회의가 안된다.우리 둘이 탁자의 상석에 나란히 앉고 양측대표단을 옆에 거느려 그들의 토의를 듣다가 무리한 점이 있으면 우리가 재판관격으로 재단하는게 어떠냐』 고 제의했다. 「우시바」 차석 대표도『그것참 좋은 방법』이라고 동의했다. 이같은 새로운 회담운영방식이 주효해 8일 끝났을 때는 조문화작업은 99%정도 완료됐던것이다.
기국주의운영에 정선방안대신 상대방 감시요원을 승선시키기로 하는등 서로가 주고받는 타협으로 타결점을 찾았던 것이다.
하꼬네회담의 성과로 다른 현안의 조문화작업도 진전을 보아 현안타결은 막바지단계로 치닫고 있었다. 양측은 이를 가속화하기위해 동경의 뉴오오따니호텔에 제2차 합숙장을 차려놓고 가편에가편을 거듭해 16일쯤에는 22일정식조인식읕 갖자는데 합의할 정도로 진전됐다.
일측은 그동안 제츨을 꺼려오던 문화재반환목록도 이즈음 제시해 합의도 보았다. 최후까지 남은것은 독도처리문제등 몇개에 지나지않았다. 나는 애당초부터 이문제는 현안이 될수 없다고 버텨왔으나 일측이 막판에 또 집요하게 제기해왔기 때문이다.
이동원외무장관이 2O일 동경에 와서 최후의 절충을 벌였다. 22일 조인식을 갖기로 했으나 22일 새벽까지도 남은 문제의 이견이 해소안될 정도로 간난을 거듭한 회담이었다.결국 독도문제는 독도의 명칭을 거론하지 않은채「분쟁해결에 관한 교환공문」 으로 어물쩡 처리하는데 양국외상이 합의했다.
14년간 끌어온 회담이 끝난 것이다. 6월22일 하오5시 수상관저에서 「사또」 수상등 한일양측인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장관과 「시이나」 외상은 『한일 기본조약』 등 29건의 관계문서에 서명했다.
나는 조인식을 지켜보면서 어렵고 어려운 현안을 해결했다는 감격도 샘솟지 않은것은 아니였지만 정말 어려운 일은 앞으로 한일관계의 새정립을 여하히 해나가느냐에 달려있다는 책임감에 대사를 치른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가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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