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용시설 세계유산 안 돼” vs “1910년 이전 유산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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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정부가 유네스코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 신청한 23곳 중에는 일제 강점기 때 6만명에 가까운 한국인이 강제 징용됐던 산업 시설 7곳이 포함돼 논란이 일고 있다. 문제가 되는 7개 시설에서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던 한국인 징용자 94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다.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현 하시마 해저 탄광. [중앙포토]
후쿠오카현에 위치한 야하타 제철소(위), 미이케 항(아래). [중앙포토]

일본의 메이지(明治) 산업혁명 유산 23곳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을 앞두고 한·일 양국이 치열한 외교전에 돌입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산하 민간자문기구인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ICOMOS)가 지난 4일 유네스코에 유산 등재를 권고한 23개 시설 중 문제가 되는 곳은 미쓰비시중공업의 나가사키(長崎) 조선소와 해저 탄광인 하시마 탄광, 다카시마(高島) 탄광 등 7개 시설이다. 일제 강점기 한국인 5만7900명이 강제로 끌려가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다 94명이 숨지고 5명이 실종됐다.

 이들 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할지는 6월 28일부터 7월 8일까지 독일 본에서 열리는 제39차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최종 결정된다. 한국과 일본·독일·인도 등 21개 회원국이 참여하며 세계유산 등록에는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하다. 한국으로선 최소 7개국의 협조를 얻어야 등록을 무산시킬 수 있다.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5일 “강제 징용의 한이 서린 시설의 유산 등록을 반대한다”며 “강제 노동 문제를 세계유산위원회 회원국들에게 강력히 제기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외교부는 유네스코 주재지인 프랑스 파리와 외교 채널을 총동원해 회원국들을 설득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 정부는 강제 징용시설에 대한 직접적 발언을 자제하는 대신, 일본에 우호적인 회원국들을 내세워 한국의 주장에 반론을 펴도록 유도하고 투표를 통해 유산 등록을 성사시킨다는 방침이다.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문부과학상은 5일 “일본의 근대산업 유산들은 1910년 이전 이야기다. 그곳에서 조선인 강제 노동이 이뤄진 게 아니다. 시대가 전혀 다르다”고 주장했다. 산업시설의 유산 등록 기간을 1850년부터 1910년까지로 한정해 한·일 강제병합 이후의 강제 징용을 교묘히 빠져나가려는 속내를 드러냈다. 일 외무성 관계자는 “한국의 압력으로 세계유산위원회 의장국인 독일이 일본 측에 한국과 협의하고 산업 유산에 강제 징용 기념비를 건립하라고 촉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산케이신문은 5일 “한국이 각국에서 반대 운동을 전개, 최종 결정까지 예단하기 어렵다”며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이 4월에 콜롬비아·페루 등 세계유산위원회 회원국을 순방하며 등록 반대를 외치고 돌아다녔다”고 주장했다. 교도통신은 “박근혜 정부가 일본과의 외교전에서 패했다는 비판이 한국 국내에서 거세질 전망”이라고 보도했다.

 한편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공주·부여·익산의 유산 8곳을 묶은 백제역사유적지구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지난 4일 국제기념물유적협의회가 백제지구를 세계유산에 등재하도록 유네스코에 권고했기 때문이다. 백제지구는 다음 달 열리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등재가 확실시된다. 백제지구가 등재되면 한국은 1995년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의 3건이 처음 등재된 뒤 20년 만에 모두 12건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게 된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의 역사 유적이 세계유산에 등재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전문가들의 마음은 착잡하다. 이종철 전 한성백제박물관 건립추진단장은 “고대에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양국이 근현대에 와서 불편하게 된 배경이 이번 유산 등재에도 반영돼 있다”며 “한국은 당당하나 일본은 역사를 부정하고 거짓 논리를 펴 국제사회에서 부끄러운 처지가 됐다”고 말했다.

  도쿄=이정헌 특파원,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hleehop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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