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서 작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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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동안 분분한 물의 속에서 우리가 잊어버렸던 문제가 하나 있다. 아직도 우리사회에서 횡행하고 있는 투서 작태에 관한 소견이다. 과연 투서행위는 사회적으로 보호받을 만한 일인가.
누구나 하기 쉬운 말로 그것은 투서를 당하는 사람에 대한 인격 모독이고 배신이며, 배덕 행위인 것은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 현실은 언제부터인지 투서를 흔히 있을 수 있는 관행이라도 되는 양 받아들이고, 때로는 그것을 은연중 권장하는 풍조마저 없지 않다.
최근 국회의 대 정부 질의에서도 정부의 한 책임 있는 당국자는 『진정인의 신원을 보호하면서 건전 고발을 적극 권장하는 자세로 임하겠다』 고 답변했다.
그런 「적극 권장」의 한 예는 최근 외화 밀반출 방지책의 하나로 관세청이「정보제공자에게 보상금」을 주는 방안을 내놓은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말이 좋아 「건전 고발」이며 「정보제공자」이지, 그 속에 담긴 뜻은 은근히 투서를 바라는 은유 같기도 하다.
이런 시속은 필시 제3공화국 시절부터 거의 공식화돼 온 것이 사실이다. 지금도 기억에 새로운 것은 1975년3월 정부의 서정쇄신 추진과 함께 모든 사정기관과 관청은 투서의 문호를 개방하다시피 했었다.
익명의 투서, 복면의 투주가 마치 무슨 마패나 되듯이 난무된 것이다. 이런 작태로 인해 연4천여명씩 3년 동안 무려 1만5천여명이 공직에서 쫓겨났었다. 이른바 「비위·부정」의 처벌을 받은 사람은 75년∼79년 사이에 12만7천명이나 되었다.
물론 그 가운데 상당수는 그만한 혐의를 받아 마땅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사직의 심판을 받아 허물을 벗은 사람도 상당수에 달했다. 문제는 증거주의에 의한 것이기보다 「투서질」에 의한 음해가 대부분이었다는데 있다.
결국 그 제3공화국도 그런 투서의 홍수에 넌더리를 내고 몇 달 만에 『무기명 투서는 접수하지 않는다』 는 공식발표까지 했었다. 이 말은 뒤집어보면 일전까지는 익명의 수서를 버젓이 접수했다는 얘기다.
잠시 우리형법을 보자. 『…공무소 또는 공무원에 대하여 허위의 사실을 신고한 자』 (156조) 는『10년 이하의 징역』을 받게 되어 있다. 결코 가벼운 벌이 아니다.
그러나 판례에 적용된 「허위사실」에 대한 처벌은 『진실의 확신이 없는 경우』 에만 적용되었다. 이를테면 『아무개가 뇌물을 받았다』 는 투서를 했을 경우, 구체적 사실의 증거도 없이 소문만 듣고 무고를 했어도 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어떤 사실을 「과장 무고」 했을 경우도 일부 사실이 부합되기만 하면 처벌을 받지 않았다.
누가 단순 채무 불이행을 사기로 무고했을 경우도 역시 처벌이 면제되었다. 그야말로 「솜방망이 법조문」 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서구사회의 형법 조문은 무고죄를 비교적 가볍게 다루는 인상이다. 프랑스 형법은 무고죄의 경우 6년 이하의 징역이나 5백프랑 내지 1천5백프랑의 벌금형을 병과하도록 되어 있다. 서독의 경우는 이보다도 가벼운 5년 이하의 징역을 규정하고 있다. 영국이나 미국의 판례는 무고죄를 위서죄나 신용훼손죄의 수준으로 다루는 경향이다.
그러나 구미사회는 법의 규정은 가벼워도 제로 법의 집행에서는 무고를 예외 없이 엄하게 다스리는 것이 현실이다. 유죄판결과 동시에 무고를 당한 사람의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도 함께 명령하고 있다.
그와 같은 경우 민.·형사의 절차를 따로 밟아야하는 우리의 번거로운 법 현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무고죄에 관한 한 구미 사회는 공·사법의 통례 적용을 고수할 만큼 명예존중에 엄격하다.
동양사회는 전통적으로 서구의 신뢰존중 못지 않게 덕망을 존중하고있다.
고래로 참언을 둘도 없는 악덕으로 지탄하여 왔다.
동양인의 에토스를 담고 있는 『시경』 하나만 봐도 무고죄를 얼마나「무도한 짓」으로 평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시경 소아편엔 이런 구절이 있다.
『무고하는 사람은 승냥이나 호랑이에게 던져라(취피●인 투승시호)』증악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승냥이나 호랑이가 먹기 싫다면 북녘 불모지에 내다 버려라. 불모지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늘 (곤) 에다 던져 버려라』
여기의 하늘은 이글거리는 불길을 말한다. 민중의 언로가 제대로 틔어있지 않았던 3천년 전의 폐쇄사회에서도 그러했거늘, 인지와 제도가 발달한 오늘과 같은 대명천지, 개방사회에서 음험한 투서 따위가 요괴처럼 출몰하는 세태는 백번 개탄해도 모자람이 없다.
최근 세평을 들끓게 한 투서사건만 해도 그렇다. 사리 분별은 잠시 접어 두고라도 우선 당사자의 경력을 보면 실로 한 나라의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공인」이 돌아 앉아 기서를 쓰고, 그것도 익명으로 요로에 보내는 행위를 서슴지 않은 것은 어디로 보나 창피를 모르는 노릇이다.
우리사회의 이런 풍조와 작태를 세계의 시민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비록 특정인에 한정된 해프닝이라고 해도, 행여 우리 국민의 일반적인 도덕수준을 가늠하는 하나의 척도로 삼을까 두렵다. 한마디로 나라 망신이다.
우리의 이런 논의는 투서를 당한 사람의 입장을 두둔하는 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누구를 특별히 비호하고 누구를 특별히 매도하는 협량한 입장에 서려고 하지 않는다. 부도덕한 사람, 법을 거스른 사람은 당연히 응분의 지탄과 처벌을 받아야한다. 더구나 국민이 납득할 수 없는 부정한 방법의 축재는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도리다.
그러나 투서와 같은 비굴하고 비인격적인 모해 행위도 우리는 정정당당히 비판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민주 시민의 도리이고 의무이다.
우리는 때때로 사회의 어떤 병리에 대해서는 필요 이상의 감상에 젖는 미성숙을 경험한다. 너나 없이 그런 것은 이제 극복해야할 시대가되었다.
우리는 투서로 밝혀진 부정과 그로 인해 야기될 국민분열, 어느 쪽이 더 잃는 것이 많을까도 생각할 줄 아는 국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 속에서 신진공업국가의 일원으로 내일에 도전하는 국민의 활기와 세련과 성숙을 가져야 할 때다.
그 첫째의 조건은 도덕적인 의연함을 스스로 터득하고 지키는 일이다. 그런 뜻에서도 우리는 최근의 투서사건을 거울로 정신적 성숙과 도덕적 결단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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