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싶은 이야기들<4062>|제80화 한일회담(261)|김동조|청구권·법적 지위 협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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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차·「아까기」농상회담과 병행해 우리측이 고삐를 단단히 죄고 달려든 청구권과 법적 지위 위원회에서 일 측은 농상회담진전을 주시하며 그에 따라 완급을 조정하는 교섭전술로 나왔다.
농상회담이 제주도주변 수역의 전관수역 기선획정문제로 교착상태에 빠진 3월 18일 열린 법적지위위원회 제18차 회의에서 「니이야」 법무성민사국장은 『타 위원회의 진전사항은 어떤가. 타 위원회와 보조를 맞춰야 되지 않을는지…』라고 노골적으로 나왔을 정도다.
나는 그래서 수석대표회담을 통해 이 같은 일 측 태도는 처음 시작할 때의 회의운영방식합의사항과는 배치되는 것이므로 각각의 현안을 별개로 떼어 제각기 합의에 이르도록 해야할 것이라고 강력히 촉구했다.
「우시바」차석대표도 나와 애초에 했던 언약이 있었던지라 자국대표단에 성의 있는 회의운영을 독려치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다 나의 맹렬한 막후절충이 주효하여 20일께는 농상회담도 대강의 타결점에 이르는 사태로 진전되자 일 측도 청구권과 법적지위협의에 성의를 갖고 나왔다.
이동원 외무장관이 미국을 방문하고 23일 일본에 도착했을 때는 대부분의 현안에 의견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 장관은 27일까지 머무르면서 24일부터 27일까지 나흘간 날마다 1차례씩 한일외상회담을 갖도록 예정되어 있었다.
나는 이 장관 방일 중 모든 현안을 종결짓도록 한다는 목표를 갖고 각종회담을 몰고 갔다. 그 결과 법적지위 문제에서는 영주권부여의 범위 중 영주권대상자의 자손을 어디까지 한정하느냐는 문제와 처우문제에 관해서만 합의를 보지 못한 채 사실상 매듭이 지어졌다.
또 청구권문제도 나의 강력한 요구에 따라 일단 김-「오오히라」 메모를 형식적이나마 백지화하는 대신 메모의 골격은 그대로 고수한다는 선까지 합의가 됐다. 이에는 일본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야당 측으로부터 집요한 공격의 화살을 피하려는 방편으로 그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일 측은 내가 김-「오오히라」 메모의 「3, 2, 1+α」의 골격 중 「1+α」를 5억 달러 이상으로 명시하자고 끈질기게 주장한데 대해 너무 과도한 요구라고 걸끄럽게 여긴 나머지 선뜻 형식상 백지화에 찬동치 못하다가 결국 응했던 것이다.
「1+α」의 5억 달러 이상 구체화협상도 이 장관 방일 직전에 대강 3억 달러이상 선까지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농상회담도 24일 상오 제주도 전관수역획정은 우리 주장대로, 어업협력자금은 9천만 달러, 또 규제척수·해상검색방법 (기국주의) 등에 관해 합의해 27일에는 가조인까지 하기로 잠정적 합의를 봤다.
한일외상회담의 고위절충에 넘기기로 된 문제는 영주권대상자의 자자손손까지 부여돼야한다는 우리 측 주장과 자손까지 한정하고 협정발효 후 25년 후에 다시 협의하자는 일 측 주장 등 실무자 선에서 도저히 타협이 안 되는 몇 개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때문에 양측대표단은 이 장관의 방일 중에 이들 현안에 모두 가조인하는 단계까지 갈 것으로 기대해 늦어도 5월까지는 정식조인이 이루어질 것으로 낙관하는 분위기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이 장관이 도착해 4차례의 외상회담을 진행하면서 양측 사이에는 이미 합의된 것 중에도 또다시 문제가 제기되는 것도 나오는 등 의외로 팽팽한 의견대립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 일 측도 다소 그랬지만 우리측에서 본국의 새로운 훈령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이 장관은 공식방문기간을 끝내고도 1주일이상 동경에 머무르면서 막후교섭에 진력해야 하는 외교의전상 유례없는 파격행동을 해야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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