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의 정치역량 한계 드러내|17일간 회기 끝난 임시국회 무엇을 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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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제122회 임시국회가 11일 폐회됐다.
17일간의 길지 않은 회기였지만 이번 국회는 11대국회의 정치적 결산이라는 성격과 앞으로의 3, 4년이 지나온 3, 4년보다는 순탄치 않을 듯한 정국풍향의 기미를 보여준 국회였다.
이번 국회는 당초 정기국회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예산안과 상관없는 일반법안을 처리하는 입법국회로 운영한다는 것이 정부·여당의 생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3년여나 끌어온 정치의안을 결말짓고 각당의 이해관계가 걸린 선거법개정을 마무리함으로써 사실상 11대 국회를 정치적으로 결산한 성격이 강하게 나타났다.
또 이번 회기중에 터진 정내혁씨 사건·대지공사사건 등 예기치 않은 뜨거운 이슈로 정부·여당이 전례 없을 정도로 궁지에 몰림으로써 선거를 앞두고 어차피 예상되는 야권의 대여공세가 더욱 만만찮아질 기미를 보여줬다.
이번 국회가 다룬 이런 문제들의 중대한 정치성과 각 당의 이해관계 때문에, 또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기적 사정 때문에 이런 문제들을 다루는 각 당의 자세나 논리는 종전보다 훨씬 여유가 없어 보였고 수준도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것도 이번 국회의 한 특징이었던 것 같다.
정내혁씨 사건만 보더라도 국민여론의 수렴과 갈등해소, 처방전의 제시라는 측면에서 국회의 기능과 여야의 정치력이 충분히 발휘됐다고는 보기 어렵다.
민정당은 선거를 앞둔 당의 타격을 의식한 나머지 명분과 논리보다는 사건의 진화와 축소에 몰두했다.
재빨리 정씨의 당직을 벗기고 의원직·당적을 내놓게 함으로써 「절연」을 통한 당과의 무관을 밝히는데 애썼다.
그러다보니 이런 사건을 맞아 당이 국민에게 당연히 밝혀야할 입장이나 자세를 충분히 밝히지 못했던 것 같다.
보통간부도 아닌 당대표위원이 사임한 이유를 「일신상의 사정」이라고 했는가 하면 국민의혹에 대해서도 성실하게 답하는 자세를 보여주지 못했다.
정씨 사건에 대해 민정당의원들이 상위에서 침묵한 것은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다해도 대지공사사건에 마저 민정당이 소극적 태도를 보인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야당 역시 국민의 기대에 못 미치는 문제의식과 능력의 한계를 드러낸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던 것 같다. 민정당이 정씨를 추진시키고 정씨의 의원직사퇴가 초미의 관심사가 될 때까지도 민한당은 대 정부 질문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당론 부재로 우왕좌왕하는 가운데 귀중한 상임위기간 반 이상을 허송했다.
정씨 사건과 대지공사 사건에 대해 마지막 이틀간 상임위에서 야당의원들이 추궁했지만 준비 부족 탓인지 내용이 산만했고 조직적인 문제규명이나 적극적으로 파헤치려는 노력은 적어 보였다. 신문보도에도 미치지 않는 질의가 대부분이었다.
재무·건설 등 몇몇 위원회에서는 동료의원의 질문을 퇴색시키려는 언동도 있었으며 국익의 차원에서 미 벡텔사와 한전과의 관계를 따졌어야할 상공위에서는 황금같은 3시간을 정부투자기관 이사장의 앉는 자세 때문에 허비했다.
결국 이번 국회가 정씨 사건이나 이정식씨 사건의 내막을 새롭게 파헤친 것은 별로 없었으며 사태를 해결하고 그런 일을 뿌리뽑을 수 있는 중지의 규합도 미흡했던 셈이다.
또 정씨·이씨·한전사건에 밀려 국회가 이번에 진지하게 처방전을 제시했어야할 학원문제·병든 소 도입·택시 사납금제·동두천 군인난동사건 등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 것도 지적해야할 일이다.
정치의안을 둘러싼 여야협상과 처리방식은 여야의 정치력수준과 대화정치의 한계를 보여준 것이다. 민한당은 지자제관계법·언기법·양곡 관리법 개정안 등을 「타살」 시키는 방식으로 결말지었고 이들 의안을 그래도 부결시키지 않고 계류시킴으로써 대화의 소지를 남기는 듯한 태도를 보여오던 민정당도 선거를 앞둔 이번 국회에서는 결국 부결처리에 응하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드러낸 여야의 체질은 대화정치와 성숙된 국회 상이 아직은 도달하기 요원한 슬로건에 불과한 게 아닌가하는 의아심을 갖게 했다. 결국 11대국회의 수준을 반영한 셈이다.
선거법협상의 결과는 기존정당의 이익에 치중돼 선거구조정·전국구 배분 문제 등 큰 구조에 관해서는 손을 못됐다. 이것은 정계의 현재 판도에 기존정당이 대체로 만족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그렇다면 야당의 일련의 정치 주장의 내실이 의심스럽게 된다. 국민당이 다소 반발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합의해준 결과다.
유일하게 여야가 합의해 채택된 학생의 날 제정건의는 실은 정치의안이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것이다. 이런 일로 여야가 왜 수년간이나 아옹다옹 했는지가 오히려 의심스럽다. <전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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