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법 행동이라도 정당한 주장은 들어줘야"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0면

권기홍 장관과의 인터뷰는 본지의 '지금은 노조시대'시리즈와 관련해 취재팀과 토론을 해보고 싶다는 權장관의 제안으로 이뤄졌다. 權장관은 "중앙일보 취재팀과 아예 말이 안 통하겠다고 생각했다면 만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노동정책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보자고 제의했다. 노동부장관으로서 겪은 두산중공업과 철도파업.화물연대 사태, 그리고 노동정책에 관한 입장을 들어봤다. 인터뷰 겸 토론은 서울시내의 한 호텔에서 반주를 곁들인 식사를 하면서 3시간반 동안 진행됐다.

-'지금은 노조시대'기사로 기분이 좋지는 않으셨을텐데요.

"옳은 지적도 있었고 균형잡힌 시각의 기사도 있었습니다. 다만 정책에 일관성이 없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할 말이 있습니다. 현 정부가 지난 정부의 정책을 계승하고 답습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보는 것은 잘못됐습니다."

-방용석 전 장관이 정부의 노동정책에 대해 쓴소리를 하셨는데요….

"(웃으면서) 며칠 전에도 뵙고 여러 걱정을 해주셨는데, 술을 덜 권해 그렇게 하신 모양이지요…."

-화물연대와 전교조 등 일련의 사태를 보고 현 정부가 친노동자적이라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불법이더라도 그들의 주장이 정당하면 들어줘야 합니다. 그것이 달라진 것입니다. 주장은 주장대로 들어주고 불법은 불법대로 처리하는 것이지요. 쟁점은 정책부서가 해결하고 쟁점의 정당함을 떠나 그 과정에서 발생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는 검찰이나 경찰이 다스려야 합니다."

-노조가 나름대로 일리있는 명분을 가지고 나오면 그 주장은 들어주고 불법에는 대응한다는 것입니까.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합니다. 각 집단의 주장은 정당할 수도, 무리할 수도 있어요. 타당한 부분은 들어줘야 합니다. 5천여만명이 사는 이 나라에서 합법적인 파업은 비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이 사회가 무균실이 될 수 있습니까."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과 관련해 교총이 연가투쟁을 선언하고 물류대란 이후 레미콘과 택시 등도 집단 요구를 하고 나섰습니다. 정부가 하나의 선례를 만든 것 아닙니까.

"결과적으로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어졌다고 하면 부인하기는 어렵지요. 그렇지만 어떤 목소리라도 짓눌리지 않고 사회 내에서 메아리를 가지게 된 것은 역사적 발전이라고 생각합니다."

-화물연대의 경우 정부가 힘에 밀려 무리한 요구를 들어줬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그 사람들이 제기한 문제 중에 틀린 것이 있습니까. 문제를 들고 나오기 전에 정부가 먼저 해결했어야 했지요. 정부는 그들의 이야기가 타당했기 때문에 귀를 기울인 것입니다."

-전교조에 대한 대응도 같은 맥락입니까.

"국가인권위가 NEIS와 관련해 전교조의 손을 들어준 마당에 엄단으로 갈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 이 문제에 단호히 대처했더라도 갈등 해결의 메커니즘이 자리잡을 수 있었는지 의문입니다."

-철도분규에서도 정부가 밀렸다는 시각이 많습니다.

"정부가 밀린 것이 뭡니까. 철도 민영화 철회는 힘의 논리에 밀린 것은 분명 아닙니다. 민영화 철회는 인수위 보고서에도 있었습니다."

-대형 분규에 정부가 법대로 대응하지 못한 것은 사전 조정능력이 떨어지기 때문 아닙니까.

"인정합니다. 그 때문에 공무원 노조와 관련해 지난 20일 노동부 입법안을 서둘러 발표한 겁니다. 이것이 공무원 노조의 파업 찬반투표에 영향을 줬다고 생각합니다."

-전경련에서 '재크나이프'이야기를 꺼내 구설에 오르기도 하셨지요.

"두산중공업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하면서 한 말입니다. 노조원에 대한 손배.가압류를 풀라고 회사 측에 부탁하자 '우리가 가진 유일한 무기인데 무장해제하라는 말이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상대방은 산별노조고 이쪽은 개별기업이고, 그쪽은 대포 쏘는 데 손배.가압류처럼 무기같지도 않은 재크나이프 들고 휘두르면 이길 수 있나. 접고 대화를 나누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거두절미돼 와전된 것이지요."

-국내 기업은 물론 외국 투자자들도 노사관계와 관련해 "법대로 해달라"고 주문을 많이 합니다.

"노동계는 기업의 부당노동행위를 엄정하게 처벌해달라고 합니다. SK글로벌 문제가 대표적 사례지요. 경제에 타격이 크다고 해 법 집행이 엄정하게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수용되는데 노조는 왜 안되나요. 기업이 투명한 경영을 하지 않으면서 노조를 법대로 다스리지 않는다고 손가락질해서는 안됩니다. 균형을 맞춰야 합니다."

-그런 말씀 때문에 노동정책이 친노동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 아닌가요.

"정부는 어떤 사회 세력에도 편향적이어서는 안됩니다. 다만 정부 내에서는 농림부가 농민을 대변하고 산자부가 기업을 대변하듯 노동부는 노동자를 대변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때문에 기업들은 불안해 하고 있습니다.

"지금 마치 노사분규가 사회를 마비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통계를 보세요. 5월 말인데도 분규 건수가 지난해의 절반도 안됩니다. 근로손실 일수도 3분의 1 정도지요. 노동계가 이런 분위기를 깨고 과거로의 회귀를 원하지는 않을 겁니다."

-노사간의 균형이나 현재의 노동정책이 한국경제의 경쟁력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으로 봅니까.

"물론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가격경쟁력이라는 신화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중국이 쫓아온다고 하는데 도망가는 경쟁을 왜 합니까. 임금경쟁이 아닌 다른 경쟁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가진 유일한 자원은 사람이에요. 인적자원의 수준을 높이고 조직화해야 외국 자본도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

-노동부가 분규 해결에 급급해 고용정책 등에는 소홀하다는 인상입니다.

"고용정책의 중요성은 절실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평생직업능력개발부'가 돼야 하지만 여전히 노동부를 '노사분규관리부'로 생각하는 인식이 강합니다. 현실적으로 정책우선순위를 결정할 때 '시급성'에 무게가 실리게 됩니다. 그래서 분규 해결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지요."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습니다.

"거기에 반론을 제기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고용시장의 안전성과 사회적 안전망도 필요합니다. 더 중요한 것은 직업전환교육 등의 시스템이지요. 노조도 머리띠만 두르고 자신들의 값을 올려달라고 요구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노동력의 질을 높여야 합니다."

-요즈음 국민의 위기의식이 더 커지고 있습니다.

"경기가 좋지 않다고 위기라고 하면 중국을 빼고는 위기가 아닌 나라가 있습니까. 경제성장률 4%를 예측하는 나라에서 위기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요."

-국민의 위기감은 경제성장률이 다소 낮아진다고 해서 나오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까지 '못 해먹겠다'는 얘기를 할 정도로 정부도 경제도 혼란스러운데서 위기감이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오히려 정부가 균형을 잃고 있다고 보는 사람도 많습니다. 새 정부의 균형이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뜻합니까.

"힘의 균형 이야기를 했더니 모두들 섬뜩해 하는 듯해서 사회통합적 노사관계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왜 노조가 책임을 지지 않고 권한만 요구하느냐'고 하고 노조는 '기업은 멋대로 하는데 왜 책임을 묻지 않느냐'고 합니다. 결국 사회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수준의 책임에 어울리는 권한을 보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힘의 균형이지요. 약자니까 약자의 편을 들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사회통합적 노사관계에서 대화와 타협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려 주시지요.

"이런 문제일수록 정도(正道)로 가야 합니다. 그래야 전체를 조감하고 해결할 수 있고, 원했던 성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상처를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내가 두산중공업에 갔을 때 노조에 '노사관계를 말하기 전에 인간관계의 기본부터 보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적어도 그들의 말을 귀기울여 들었고 사용자들에게 진심으로 전달했습니다. 신뢰를 심어주려고 한 것이지요. 정권이 진심으로 나오면 누구든 등돌리기 어려운 것 아닌가요."

<중앙일보 특별취재팀>
김정수 전문기자(경제연구소), 남윤호.김기찬.하현옥 기자(이상 정책사회부).강병철 기자(산업부).김상선 기자(사진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