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CoverStory] 기억나세요? 그때 그 연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2면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안도현 시인의 시구처럼 연탄은 살아서 서민들의 아랫목을 따뜻하게 달궈줬고 죽어서 팍팍한 삶에 대한 화풀이 도구가 됐다. 지금이야 서민 아파트에도 웬만하면 단추 하나로 켜고 끄는 기름.가스 보일러가 설치돼 있지만 1980년대만 해도 대다수 국민이 연탄과 더불어 추운 겨울을 났다. 연탄은 경제적일 뿐만 아니라 다목적이었다. 검은 몸을 하얗게 불살라 만들어낸 열기는 방을 데우는 것 말고도 밥을 짓고 국을 끓였으며 빨래를 삶았다.

하지만 수명이 짧은 게 흠이었다.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 위해 모든 가정의 어머니들은 이른 새벽 단잠에서 깨어나 연탄을 갈아야 했다. 싹수 있는 자식들은 저들끼리 순번을 정해 피곤한 어머니 대신 서툰 연탄 갈이를 하기도 했다. 연탄을 가는 건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저마다 똑같은 크기와 수의 구멍을 가졌는데 어째서 윗것과 아랫것의 구멍이 제멋대로 노는 건지. 수년에 걸쳐 쌓은 내공 없이는 공연히 가스만 실컷 마시고 구멍을 제대로 못 맞춰 꺼뜨리기 십상이었다. 또 위아래 연탄이 서로 철썩 들러붙어 있을 때의 난감함이란. 연탄을 떼어내기 위해 이리저리 흔들다 보면 다 탄 놈 대신 벌겋게 단 연탄이 깨져 나가기도 했다. 위아래 연탄이 제대로 아귀가 맞아 찰떡궁합처럼 붙어있는 연탄은 별 수 없이 식칼을 동원한 분리수술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런 불편함을 개선하기 위해 연탄을 두 개가 아니라 세 개를 넣어 연소 시간을 길게 한 연탄 보일러가 나왔고 지그재그식으로 만들어 연탄이 서로 붙는 것을 방지한 화덕도 개발됐다. 연탄 초보자들에게 더없이 고마운 존재가 바로 '번개탄'이다. 연탄불을 꺼뜨렸더라도 번개탄에 성냥 하나만 그어 대면 금세 활활 타올랐다. 연탄 사용은 크게 줄었지만 번개탄은 여전히 많이 쓰이고 있다. 야외 바비큐용으로 변신에 성공한 덕분이다. 조개구이나 삼겹살집에서도 비싼 참숯 대신 번개탄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전엔 톱밥을 뭉쳐 번개탄을 만들었으나 요즘엔 톱밥이 귀해 폐목재를 분쇄해 만든다고 한다.

연탄은 서민들의 친구로만 머물지 않았다. 때론 사악한 악마로 변신했다. 날이 흐리면 연탄가스가 방안으로 스며들었다. '잠자던 일가족 연탄가스 질식사'는 겨울철 흔히 볼 수 있는 신문기사 제목이었다. 당시의 초년병 기자들은 연탄가스 사망자의 사진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다. 연탄가스에 중독됐을 때 동치미 한 사발을 들이키거나 식초를 마시는 게 효과가 있다는 민간요법이 등장하기도 했다. 증명할 순 없지만 연탄이 사람의 목숨을 구한 적도 있으리라. 올해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엔 연탄의 존재가 아쉽다. 옛날 눈 내린 뒤 빙판길이 된 골목 언덕길에는 어김없이 연탄재가 뿌려졌다. 보기도 좋지 않고 길이 더러워지는 문제에도 불구하고 노약자들의 낙상을 막아주는 데는 연탄재가 더할 나위 없이 고마운 역할을 수행했다.

숟가락에 설탕으로 녹여 만드는 '달고나' 역시 가스불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추억의 간식이다. 요즘처럼 한파가 계속되는 날씨 속에는 연탄 화덕을 넣은 깡통 탁자에 둘러앉아 삼겹살이나 조개구이에 소주 한잔을 기울이는 것도 나쁜 아이디어는 아닐 것 같다.

이훈범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