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전 거울로 오늘을 보다] 17. 동양이 본 개화기 조선-허동현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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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대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자국에 대한 측면 공격의 우려, 즉 '후고(後顧)'가 없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세기 전 일본이 조선을 넘보자 중국인들은 자국의 안위를 염려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점령한다면, 동삼성(東三省: 봉천.길림.흑룡강)의 근본 중지(重地)가 울타리를 잃게 돼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염려가 있어 후환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1875년 운양호사건에 대한 중국 최고 실력자 리훙장(李鴻章)의 논평입니다.

그 후 1879년 들어 일본이 류큐(오키나와) 왕국을 병합하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 분쟁이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크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1880년 주일 공사 허루장(何如璋)은 "만일 조선이 멸망하면 우리의 왼팔이 끊기고 울타리가 모두 없어지게 되어 후환은 더 말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중국이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청일전쟁(1894)으로 한반도에서 축출되기까지,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은 중국의 패권주의에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준 중국 사람은 없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러했으니 동시대 일본 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요.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하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 반제 전선에 조선인들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국인들도 한국을 진정으로 도우려 했다기보다는 일본과의 싸움에 우리의 선열들을 이용한 면이 큽니다.

국민당은 의열(義烈)투쟁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일본이 항복하기 전까지 우리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한 바 없으며, 공산당도 조선 의용군을 자신들의 팔로군 휘하에 두어 써먹었을 뿐 중국 내에서 한국인의 독자적 투쟁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 궈모뤄(1892~1978)가 지은 항일소설 '목양애화(牧羊哀話)'(1919)는 당시 중국인들의 본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양반 민숭화(閔崇華)와 민패이(閔佩荑)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우리 민족에 대한 동정을 표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화를 숭상한다'는 뜻인 '숭화'와 '(일제에 항거하는) 오랑캐에 탄복했다'는 의미인 '패이'에서 알 수 있듯이, 중국인들은 20세기 들어서도 여전히 중국 중심의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편 식민지시대 일본의 우파들은 기껏해야 자치론을 내비칠 뿐, 한국인의 독립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비판한 일본 최고의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2~1996)까지도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재일동포 문제 등에 대해 침묵할 정도였지요.

물론 박선생님 말씀대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은 반제 투쟁에서 한국인들과 연대를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방침에 따라 한국인들의 독자 단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인의 반제 투쟁은 일본인의 그것을 대신하는 처지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사연구회'를 만들어 황국사관을 비판하는 데 앞장섰던 하타다 다카시(旗田巍, 1908~1994)의 고백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모멸적 인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줍니다.

"일본의 공산주의운동.노동운동의 강령 속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명문화되어 있기는 했으나, 일본인이 해야 하는 운동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많은 희생이 예상되는 곤란한 투쟁의 경우 한국인에게 선봉을 맡기는 일이 많았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오리엔탈리즘과 중화주의를 표방한 일본과 중국의 이익에 희생된 약자였습니다. 일제 침략에 맞서 계급적 연대를 도모하던 중국과 일본의 사회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 선열들을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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