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때부터 불편한 관계「투서」로 치명상입은 정래혁·문순태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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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같은 고향출신으로 반평생을 라이벌로 지내온 정내혁씨 (58)와 문형태씨(62) 는 결국 투서를 주고받아 두 사람 다 정치생명에 치명상을 입는 관계로까지 치닫고 말았다.
한 사람은 호남정치인의상징으로 자리를 굳혀온 민정당 대표위원직을 물러나야했고 또 한사람은 권토중래의 꿈이 무산되는 속에 당국의 조사를 받고있다.
이순의 고개를 넘거나 바라보는 두 사람이 이처럼세상을 떠들썩하게하고 연간적 파국을 초래하기 까지에는 얽히고 설킨 얘기가 한 두가지가 아니다.
그래서 이들의 관계는 곧잘 숙명적이라든가 악연이란 말로 표현된다.
곡성출신인 정씨는 8백성쯤 하는 부농집안. 선친은 일제때 면장을 지냈고 문씨는 광주서중에서 수석을 놓치지않는 수재였다.
서중4학년때 일본육사에 입학한 정씨는 유복한 가정에서 주변의 칭찬만을 듣고 성장했다.
반면 문씨는 인접 화순의 빈농에서 태어나 일찌기 가난을 몸서리내고 지게를 지기 싫어 일본군에 지원입대했다.
문씨 자신은 이런 성장과정을 숨기지 않고 얘기한다.
각기 다른 환경에서 자란 두사람은 해방후 군에서 처읍 만났다.
4세위인 문씨는 국군에 편입, 고 박정희대통령과 동기인 육사2기로 먼저 임관되었다.
정씨는 해방직후 미군정청에 근무하다 미고문관과 싸워 사직하고 감시 경찰관(경감) 생활을 하다 그것마저 치워버리고 육사특7기로 입교했다.
육사입교는 정씨가 늦었으나 문씨는 일본육사경력을 인정받아 바로 소령으로 임관돼 군에서의 진급은 큰 차이가 없었다.
문씨는 송요독장군등 주로 일본지원병 출신에 인맥을 대고 있었고 정씨는 채병덕-이종찬-박정희로 이어지는 일본육사출신들에게 인정을 받았다.
장성이 되면서 두사람의 관계는 눈에 띄게 나빠졌다.
두사람은 한때 육본인사위원회에서 같이 일한 적이 있는가 서로 상대방이 추천하는 사람의 진급을 견제했다.
두 사람중 한사람에게 부탁하면 될일도 안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나돌 정도였다.
5·16이 나면서 두사람의 경쟁은 묘한 양상을 보였다.
정씨는 최고위원으로 혁명에 참가, 상공장관을 지내고 원대복귀한후 중장으로 예편했다.
계속 군에 있던 문씨는 4성장군에 올랐다.
두 사람간의 반목은 끝나는것 같아 보였다.
68년 합참의장이된 문씨는 자신이 멀지않아 국방장관이 되리라 기대했다.
정씨는 당시 한전사장이었다.
70년초 합참의장 임기만료를 얼마 앞두고 문씨는 국방장관 승용차 인수계획을 세울정도로 자신에 차 있었다.
그러나 국방장관엔 정씨가 임명되었다.
문씨는 『벌레 씹는 기분』 (본인의 말)으로 5개월을 지내다 예편했다.
문씨의 다음 꿈은 국희의원이었다.
문씨는 군재직때 권오태씨와 더불어 고향사람을 챙기는등 일찍부터 극성스럽게 지역구 기반을 다진 것으로 유명하다.
두사람의 관계를 잘알고있던 박대통령은 문씨에게 8대 (71년) 공화당공천 (화순-곡성)을 주어 의정의 꿈을 이루게했다.
문씨가 국회에 있는동안 정씨는 실미도난동사건으로 국방장관을 사임했다.
8대국회가 해산되고 9대 (유신국회) 총선에서 문씨는 고향에서, 정씨는 서울성북에서 각각 당선됐다.
앙숙은 9, 10대의 의정생활을 함께 하면서도 계속됐다.
서로 『소가 닭보듯』 지내와 공화당의원들은 일부러 두사람이 한자리에부딪치지 않도록 신경쓸정도있다.
10·26과 5·17은 두사람에게 또 한차례 운명의장난을 걸었다.
박대통령이 김재규에게 시해되자 문씨는 곧 위축되었다.
김은 문씨와 육사동기생이었고 같이 죽은 차지철경호실장은 문씨와 자타가 공인하는 특별관계였다.
반면 정씨는 오히려 출세의 길을 걸었다.
김종필씨가 공화당총제가되고 당직개편을 하면서 정씨는 평당무위원에서 서열3위의 중앙위 의장이되었다.
5·17후 김종필씨등이 당국의 조사를 받고 공화당이 지리멸렬하는 가운데 정씨는 공화당재산청산위원장이 되어 공화당재산을 민저당에 넘겨주고 자신은 입법회의부의장, 제5공화국의국회의장, 민정당대표위원을역임했다.
이즈음 정치 피규제자로 묶인 문씨는 그늘속에서 정씨의 승승장구를 지켜봤다.
자신이 3선을 하면서 가꿔온 지역구 (화순합성-담양) 는 어느새 정씨의 차지가 되었다.
문씨는 『나는묶이고 그는 왜 출세해야하는가』에 대해 결코 납득할수없었다.
정씨는 공화당조직을 인수하면서 문씨의골수추종자들을 모두 잘라냈고 문씨의 위세에 눌려못했던 선친·장인·당숙의추모비를 세우기도 했다.
지난 2월25일의 2자해금은 휴화산에 불을 당기고 말았다.
해금발표후 문씨는 전남출신증 제일 먼거 고향을 찾았다.
옛날의 추종세력들은 화순의 문씨자택에 마이크를 걸고 대대적인 환영식을 했다.
문씨는 말했다.
『나는 정치를 재개한다. 그러나 4성장군이 야당을 어떻게 하나. 나는 국민당에 안간다. 정씨는 민정당전국구로 가고 내가 공천을 받을 자신이 있다. 선도 대놓고있다. 내 재산 60억원중 20억원을 다음 선거에 쓸 각오다. 정씨는 부정축재를 했고 내가 한마디하면 끝난다.』
이런 움직임은 정씨에게 속속 보고되었고 급해진 정씨의 지역구활동도 눈에 띄게 강화되었다.
정씨는 투서로 문씨의 공격이 죄어오자 권익현당시 사무총장등에게 『어떻게 처신하면 좋으냐』 고 묻기도 하고 『치가 떨린다』 는 말을 자주했다. <전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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