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힐러리의 경제 브레인들

중앙일보

입력

올 1월 15일 미국에서의 일이다. 일단의 전문가들이 경제정책 로드맵을 완성했다. 제목은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위원회(Inclusive Prosperity Commission) 보고서’였다. 단 한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경제정책 리포트이다. 바로 힐러리 클린턴(68).

힐러리는 보고서를 탐독했다. 그가 출마를 선언(4월 12일)하기 약 세 달 전의 일이다. 허핑턴포스트는 “이후 힐러리 입에선 보고서 내용이 자주 흘러나왔다”고 최근 전했다. ‘부의 불평등’ ‘세금 제도 개선’ 같은 용어들이다. 힐러리가 말만 그렇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보고서에 부합하는 행동을 보여주고 있다. 출마 선언 약 20일 전인 3월 23일 힐러리는 수도 워싱턴에서 열린 토론회에 참석했다. 주제는 ‘도시 개발과 경제, 일자리’였다.

참석자들은 미국 중앙과 지방 정부 공무원노조 위원장, 교원노조 대표 등이었다. 힐러리가 20만 달러(약 2억2000만원) 정도씩 받고 참석한 월가의 콘퍼런스와는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주 편안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심지어 벗들을 오랜만에 만난 표정이기도 했다.
힐러리는 “미국의 중산층이 붕괴하고 있다”며 “부의 불평등이 더욱 심해졌다”고 말했다. 노조 대표 등 참석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기 위한 말이 아니었다. 그날 그의 발언은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위원회’의 조율을 거쳐 나온 말이었다.

위원회 닉네임은 ‘서머스팀’이다. 버락 오바마 현 대통령 1기에 국가경제위원장을 지낸 래리 서머스(61)가 공동 의장이어서다. 그는 힐러리 남편 빌 클린턴이 대통령이던 시절엔 재무장관을 지냈다.

서머스팀은 다국적군이다. 또 다른 공동 의장이 영국 노동당 의원이면서 집권시 재무장관이 될 에드 볼스다. 또 파르 누데르 전 스웨덴 재무장관이 위원이다. 호주와 캐나다 출신도 있다.

경제 전문가만 있는 게 아니다. 전 미시건 주지사인 제니퍼 그랜홈은 경제 이론가는 아니지만 힐러리 정치 참모로서 경제정책 선택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정치 칼럼니스트인 E. J. 도니(워싱턴 포스트)도 경제 전문가가 아니다.

시사 주간자 타임은 “대통령직을 향해 뛰는 사람의 경제 싱크탱크 가운데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위원회’만큼 다국적군은 드물었다”고 평했다. 국적만 다양한 게 아니다. 사모펀드나 투자회사 대표가 참여하고 있다. 노동계 대표도 중요 멤버다.

타임지는 “힐러리가 대통령이 된 이후 실제 경제팀을 어떻게 구성할지는 아직 미지수”라며 “다만 위원회가 제시한 로드맵이 경제정책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했다.

서머스팀의 색깔은 무엇일까. 힐러리의 기존 이미지와는 딴판이다. 힐러리는 민주당 내에서 보수적인 인물 또는 월가와 가까운 인물로 분류된다. 그는 2008년 버락 오바마와 대선 후보 경선 내내 “머니 트러스트(월가의 독점 금융자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이 힐러리”란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이게 트라우마였을까.

힐러리는 상당히 진보적인 팀을 꾸렸다. 팀 리더인 서머스는 최근 본사 사공일 고문과 대담에서 “부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누진세를 강화해야 한다”며 “노동계의 힘을 강화해 기업인의 자의적 경영을 견제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고서가 만들어진 곳의 이름부터 범상치 않다. 미국진보센터(CAP: Center for American Progress)다. 2003년 설립됐다. 당시 더네이션지는 “보수 쪽 헤리티지와 미국기업연구소(AEI)에 대항하기 위해 진보성향의 싱크탱크가 탄생했다”며 “이름부터 ‘진보’를 분명히 했다”고 전했다. 현재 CAP 소장은 서머스팀 일원인 니라 탠던이다. 허핑턴포스트는 “서머스팀이 곧 CAP이고, CAP가 곧 서머스팀이라 해도 비약이 아니다”고 평했다.

실제 서머스팀이 힐러리에게 제출한 보고서 내용에 CAP 색깔이 짙게 스며들어 있다. 모든 초점이 부의 불평등에 맞춰져 있다. 경제성과 가운데 노동자 몫을 늘리기 위해 기업 지배구조를 바꾸고 세제를 개혁해 경제 정의와 총수요를 늘린다는 것이다. 학자금 융자 제도를 개선해 저소득층의 교육 혜택을 확대하는 방안도 로드맵의 핵심이다.

CAP는 “미국 중산층을 복원하는 게 ‘모두가 잘 살기 위한 위원회’ 보고서의 중심 테마”라고 설명했다. 오바마도 대선 후보시절 중시했던 부분이다. 하지만 서머스는 보고서 발표 직후 언론과 인터뷰에서 “오바마 행정부는 금융위기를 진정시키고 경제 자체를 소생시켜야 했다”며 “중산층 복원이나 부의 불평등 완화 등을 제대로 추진할 상황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때가 됐다는 말로 들린다.

힐러리는 놀라운 순발력을 발휘했다. 평소 보인 보수적, 친 월가적 태도를 버리고 좌(左) 선회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바마가 2009년 대통령 취임 이후 실제로 쓴 경제 정책보다 상당히 진보적이다. 딘 베이커 CEPR 소장은 “미국 현실 자체가 오바마 때보다 한결 진보적인 대안을 요구하고 있다”고 했다. 미국에서는 요즘 부의 불평등과 사회적 차별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고 있다. 볼티모어 등에서 흑인들의 폭동이 일어난 게 대표적이다.

게다가 민주당 내 노선 지형도 힐러리의 선택에 크게 작용했다. AP통신은 “힐러리가 오바마의 실제 경제정책과 민주당 내 좌파의 상징인 엘리자베스 워런(66?매사추세츠 상원의원) 사이의 중간을 선택했다”고 풀이했다.

워런은 반(反) 월가 정치인의 대표다. 그는 금융소비자보호원 설립을 강력히 주장해 관철시켰다. 그는 2012년 선거에서 공화당 스코트 브라운 상원의원을 이겼다. 매사추세츠 역사상 최초로 여성 상원의원이 됐다. 순식간에 민주당 좌파의 대표주자로 떠올랐다.
워싱턴포스트(WP)는 “본인은 고사하지만 2016년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설 확률이 높다”고 전했다. 민주당 좌파들이 힐러리 대항마로 워런을 밀고 있어서다. 힐러리가 긴장할 만하다. 힐러리는 김빼기 작전을 채택했다. 바로 워런의 정책을 상당 부분 받아들이는 전략이다.

영국 가디언지는 27일 전문가의 말을 빌려“힐러리가 민주당 내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점점 워런처럼 말하고 행동하고 있다”고 평했다. 실제 힐러리는 최근 아이오와주 지방지에 기고한 칼럼에서 “최고 경영자(CEO)와 헤지펀드 매니저가 일반 노동자보다 300배 이상 버는 현실은 잘못됐다”고 썼다. 20만 달러 정도를 받고 뉴욕 최고급 호텔의 콘퍼런스 룸에서 투자은행가들을 상대로 연설하던 힐러리가 쓴 글이라고 믿기지 않을 정도다.

힐러리는 오바마보다도 왼쪽으로 한 걸음 더 가기 위해 민주당의 기존 싱크탱크인 브루킹스와도 거리를 뒀다. 브루킹스 '해밀턴 프로젝트팀'이 바로 오바마 경제팀의 주축이다. 해밀턴팀은 부의 분배보다는 성장 엔진의 부활을 강조했다. 오바마도 대선 후보시절 한 때 CAP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하지만 대통령이 돼서는 해밀턴팀의 정책 대안을 주로 채택했다. 민주당 내에서 "오바마가 월가와 가까워졌다"고 평가받는 까닭이다.

힐러리의 좌선회 때문에 워싱턴 싱크탱크 지형도 확 바뀔 전망이다. 역사적으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경제팀 주축은 미국기업연구소(AEI) 팀이었다. AEI는 네오콘(신보수)의 아성이다. 자유방임과 시장주의 원칙을 중시한다. 보수적인 싱크탱크 가운데 가장 보수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민주당 쪽인 브루킹스마저 AEI의 영향을 받아 상당히 보수적인 정책마련에 집중하곤 했다. 그런데 허핑턴포스트는 "진보적인 CAP가 설립 12년 만에 AEI를 제치고 워싱턴 주류 싱크탱크로 발돋움하고 있다"고 평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