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재불작가의 실상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4면

『오늘 우리가 직면한 절실한 문제들을 작가의 공통된 의식과 자각을 통해 대화로 풀어 나가고 창작활동의 정진과 발전을 촉진키 위해…』
81년5월 창립됐던 「재불한국작가회」 발기 취지문의 첫머리다.
창립총회에선 김종하·박일주·백영수·백철극·손동진·이성자·이항성씨 등 60세 전후의 작가들이 자문위원으로 추대됐고 회장에 한묵씨, 운영의원에 김기린·손수광·정상화· 정문규·진유영·한창조씨가 선임됐다. 「작가회」는 같은해 3월 파리 한국문화원에서 열렸던 「한국현대미술전」을 계기로 젊은 작가들이 추진, 원로 및 중진들이 호응해 빛을 보게 됐다.
한국작가들이 파리에 진출하기 시작했던 30년대로부터 근50년만의 일이다.
한국작가들은 그동안 이같은 모임을 몇 차례 시도한 일이 있었으나 고질적인 파벌싸움 때문에 번번이 좌절됐다.
그만큼 「작가회」의 발족은 당시 작가자신들은 물론, 교민들의 큰 기대를 모았다.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가, 「작가회」는 창립 5개월만에 두 조각으로 깨어졌다.
82년4월로 예정됐던 문공부주관 해외작가초대전의 초대작가 선정을 둘러싼 잡음이 불씨였다.
「작가회」 집행부의 초대작가 선정과정에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는 일부 탈락자들의 대 집행부 비난 성명파 호소문이 어지럽게 나돌았고 급기야는 탈퇴소동으로 번졌다.
「작가회」를 뛰쳐나온 사람들은 그해 10월 「파리한국미술협회」를 따로 만들었다. 이 협회는 「작가회」의 자문위원이었던 김종하·이항성·박일주·백영수씨 등이 주도했다.
그리고 이들 두 단체의 그후 소식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파리에 아무도 없다.
불화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서 상조란 기대하기 힘들다. 재불작가들 사이에 작품활동이나 생활과 관련한 어쭙잖은 정보조차 쉽게 교환되지 않고 있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프랑스엔 예술인을 위한 특혜가 많다. 창작활동에 따른 수입에 알맞게 세금을 내고, 적당량의 활동을 계속한다면 의료보험 등의 사회보장혜택을 받을 수 있다. 정부가 정책적으로 국내외 예술인들에게 할당하는 아틀리에나 주택을 헐값으로 영구 임대 받을 수도 있다.
사회보장과 주택· 작업장이 확보된다면 큰 고생 없이 작품활동을 할 수 있는 까닭에 예술인이면 너나 없이 이를 원한다.
이런 혜택을 방기 위해선 「예술인의 집」으로 불리는 예술인단체에 우선 가입돼야하며 까다롭고 복잡한 수속을 거쳐야 한다. 프랑스 예술인들도 힘들어하는 판이어서 언어장벽까지 있는 한국작가들에겐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파리에 정착한지 오래거나 재주 있는 한국작가들 중용케도 이런 혜택을 받고 있는 이가 10명 정도 있다. 그러나·이들에게서 이런 수혜와 관련한 필요한 정보나 조언을 받아 보았다는 사람은 드물다. 차라리 외국인작가들의 도움을 받는게 마음 편하다는 이도 있다.
자신이 오랫동안 고생해서 손에 넣은 「떡」을 남이 손쉽게 얻어 먹는다느건 아무래도 배아픈 일이다. 『프랑스 정부가 내게 아틀리에를 특별히 지어줘 작업에 불편이 없고 사회보장 혜택을 받아 고생없이 지내고 있다.』 간훅 서울에서 귀국전을 갖는 재불작가 가운데 매스컴과의 회견 때마다 이런 말로 필요이상 으스대는 사람을 본다.
반드시는 아니더라도 이런. 사람 속에서 동료작가에게 도움을 주는 이를 만나기는 더욱 어렵다.
『아무개가 지난 서울 전시때 몇장의 그림을 팔았다더라』 는 소문과 『사실은 한장도 못 팔고 실패했다더라』는 말이 동시에 꼬리를 무는 것도 결국 이런 풍토 때문이다.
파리화단에서의 활동도 각양각색이다.
주로 살롱전 출품이 많아 한해 평균 1백여명이 참가하고있으며 대부분이 대여 화랑을 통한 것이지만 개인전을 갖는 작가도 해마다 20명 이상에 이른다.
재불 작가 중에는 역량이 인정돼 어느 정도 이름 있는 화랑의 초대를 받는 이도 있고 발로 뛰며 화상을 붙잡는 사람도 있다.
외국 신진작가들이 흔히 하듯 자신의 작품을 들고파리 화랑가를 뒤지고 다니는 것이다.
자기소설을 출판하기 위해 출판사를 찾아다니는 소설가와 한가지로 그것은 어려운 작업이다. 좀처럼 얻어걸리기 힘든 일이나 이런 방법으로 뜻밖에 좋은 화랑에서 초대전을 할 수 있었던 억척작가도 있다.
파리에서 보다 이웃 서독이나 멀리 뉴욕·캐나다에서까지 전시회를 갖는 사람도 있다. 파리화단에 발 불이기가 어려운 탓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이런 곳이 파리보다 시장이 넓은 까닭이다.
서울서나 마찬가지로 이곳 작가들은 자신의 그림 값에 무척 예민하다. 오히려 서울보다 더한 것은 당장 서울시세에 미칠 영향 때문에서다.
한국에서 중견이상의 대접을 받는 C씨를 파리화랑이 신진작가로 대우해 C씨가 개인전을 포기한 일도 있고, B씨나 P씨 등은 화랑측이 그림 값을 한국시세의 3내지 4분의1밖에 쳐주지 않아 격분한 적도 있다.
서울고객을 상대로 그림을 팔 때도 우선은 자신이 고집하는 서울시세에서 조금이라도 싸게 내놓는 법이 없다. 거저 주면 주었지 시세보다 낮게 주진 않는다. 뒤에 떠돌 소문이 두려워서다.
이런 고집 때문에 제값(?)받고 한점을 팔고 또 한점을 덤으로 거저 주는 궁여지책이 나온다. 이래서 같은 한국작가의 작품이 파리에서 보다 한국에서 훨씬 비싸게 팔린다는 이른바 그림 값 하비는 맞는 것일 수도, 틀린 것일 수도 있게된다. 한국 작가들이 파리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는 작가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파리=주원상 특파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