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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를 누르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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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채인택
채인택 기자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채인택
논설위원

미국을 방문 중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일정 중 눈에 번쩍 띄는 것이 29일(현지시간)의 사사카와(笹川) 재단 기조강연이다. 한국과 일본에선 이를 ‘미국 내 대표적 일본 홍보기관’이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사사카와의 정체를 알면 기가 막히고 소름이 끼친다. 역사 왜곡에 조직적으로 관여해 왔다는 의혹이 있는 우익 거물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1899~1995)의 이름을 딴 것이기 때문이다.

 사사카와는 자타가 공인하는 파시스트다. 태평양전쟁 전 이탈리아 파시스트인 베니토 무솔리니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1931년 일본판 파쇼 정당인 국수대중당을 창당해 총재를 맡았다. 39년에는 이탈리아로 날아가 무솔리니와 회견해 유명해졌다. 비행기와 비행장을 군에 헌납하며 애국운동을 주도하다 42년 중의원에 당선했다. ‘한 사람의 목숨을 한 대의 비행기에 실어 적 군함 한 척과 바꾼다’는 개념을 주장해 가미카제 자살공격의 이론적 배경을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종전 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용의자로 지목됐지만 3년간 수감된 뒤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석방된 사사카와는 경정(조정 경주) 사업으로 거부가 됐고 이를 바탕으로 62년 닛폰재단(日本財團·The Nippon Foundation)의 전신인 일본선박진흥회를 세웠다. 닛폰재단은 약 2660억 엔의 자산에서 발생하는 연간 220억 엔 정도의 수익을 예산으로 쓰는 일본 최대의 재단이다. 사사카와는 74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전 세계에서 가장 돈이 많은 파시스트다”라고 대놓고 말했을 정도다.

 닛폰재단은 선박 조사·민간 교류·일본 홍보·빈민 지원 등의 일을 하는데 실상은 각국의 지식인·학자·정치인에게 파고들어 사사카와의 전범 행적과 일본의 전쟁범죄를 왜곡하는 일을 주로 해왔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것이 이 재단이 출자한 도쿄재단이 난징 대학살을 허구라고 왜곡하는 책자를 전 세계에 뿌린 것을 들 수 있다. 아베가 이런 단체에서 연설한 이유는 ‘지지기반 다지기’로 볼 수밖에 없다. 일본이 민간단체를 앞세워 민간 교류라는 명분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체계적으로, 끈질기게 역사 왜곡 활동을 펴왔는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베가 이번에 미국을 방문해 보여주고 있는 역사 유린적 행동이 이미 오래전부터 철저하게 준비된 것이라는 이야기다.

 일본 정부도 미국의 홍보·로비 업체를 고용해 물밑에서 미국의 정책입안자들에게 치밀하게 사전정지 작업을 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일본 정부는 미국 대형 홍보회사인 ‘대슐 그룹’과 로비 전문 로펌인 ‘아킨 검프’ ‘호건로벨스’ ‘포데스타그룹’ 등과 계약했다는 보도가 이를 뒷받침한다. 미 주류사회와 연결되는 홍보·로비 업체를 고용해 미국의 정책입안자·의사결정권자·막후실력자·싱크탱크·미디어 등을 상대로 일본에 긍정적인 이미지를 줄 수 있는 노하우와 방안, 인맥을 제공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도 접촉하는 국무부나 국방부가 아니고, 최고위층을 움직일 수 있는 비공식 이너서클에 직접 파고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한마디로 일본 정부는 홍보회사·로비회사를 고용해 적극적으로 미국의 수뇌부에 접근하고, 파시스트임을 공언하는 극우인사가 생전에 만든 민간단체는 왜곡된 역사인식을 미국에 퍼뜨리기 위해 파상공세를 폈다는 이야기다. 이에 맞서 한국 정부와 민간은 성명 발표·공무원 접촉·시위·항의서한·신문광고 등으로 대중들을 상대로 일본의 역사 왜곡 행위를 필사적으로 고발했다. 하지만 이처럼 미국의 심장부에 은밀하게 파고든 일본에 역부족이었을 수 있다.

 이제 국익을 지키기 위해 대미 접근의 패러다임을 근본적으로 전환해야 할 때다. 비용이 들더라도 미국을 움직이는 사람에게 공식·비공식적으로 접근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탄탄한 홍보와 로비 전략이 필요하다. 그런 인물을 찾아 외교 전면에 배치하는 방안도 있다. 과감하게 외국 홍보·로비·전략·마케팅 회사를 고용하는 방안도 적극 고려해야 한다. 우리 외교관들이 제아무리 유능하고 충성스러워도 이들만으로는 일본에 대적해 우리 국익을 지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아베의 방미 성과가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채인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