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전통 네머슴」을 기린다|문경군 농암1리 주인들의 "애틋한 사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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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백여년전 「동네머슴」의 사랑과 봉사를 못잊어 하는 한마을 1백여가구 주민들이 머슴의 넋을 동네의 수호신으로 받들고 대를 이어 동제를 지내며 기념관을 짓고 행장기 발간을 준비하는등 전설같은 인간드라머를 1세기에 걸쳐 잇고있다.
화제의 마을은 경북문경군농암면농암1리 속칭 농바위골 1백10가구 주민들.
이 마을의 수호신이 된「인간애의 머슴」은 서문경.
지난달11일 동네주민들은 그가 돌아간지 1백년을 맞아 동네어귀 들판에 자리한 그의 묘소 앞에 상석과 망주석을 세우고 온동네 주민들이 참석한가운데 동제를 지냈다.
「고 달성서공문경지묘 1819∼1884년」이라 쓴 상석 뒷면에는 『농바위골의 수호신인 서문경의 1백주기를 기념, 농암1리 동민들이 건립함』이라고 새겼다.
서문경머슴이 이 마을에 산것은 조선조말 l8세기중엽. 1백45년전인 1839년에 그는 스무살 청년으로 어디선가 흘러 들어와 마을에 눌러앉았다. 어수선한 난세, 먹여주고 재워주는 조건만으로 그는 동네머슴이 됐다.
1850년대 어느해 전국에 콜레라가 유행했다. 이 마을도 예외가 아니어서 수십명이 며칠새 숨지는 사태로 번졌다. 직계가족들마저 전염될까봐 시신을 만지기 꺼려하는 판이었다. 그는 거리낌없이 이들 시체를 일일이 염습해 정성껏 안장해주었다.
어느핸가는 또 홍수가 나 마을앞 속칭 개바위천 개울가에서 놀던 어린이3명이 물에 휩쓸렸다. 서문경머슴은 급류속에 뛰어들어 떠내려가는 어린이들을 모두 구해냈다. 그러고도 동네주민들의 치사에 『뭘요』할뿐이었다.
이에 감동한 동네주민들은 1년에 벼1섬씩 새경(사경)을 주기로했다. 그는 장가도 들지 않은채 뼈빠지게 일만했다. 돈쓸줄도 몰라 새경은 해마다 모아졌다.
환갑도 지나 65세되던 1884년 추수때 45년간의 동네머슴살이 끝에 모은 새경으로 논2필지 4백22평(두마지기)을 마련했다. 평생에 처음으로 갖게된 자기재산이었다.
그러나 논문서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에 그는 노환으로 몸져 누었다가 그해 음력10월17일 이세상을 뜨고 말았다. 임종에 앞서 그는 『들에도 나무에도 의지할데가 없는 사람을 평생토록 아무탈 없이 살게해준 농바위골을 저승에 가서도 잊을수없다』며 『내 죽거들랑 장례나 치러주고 기일에 찬물이나 한그릇 떠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평생 재산인 논 두마지기는 마을에 희사됐다.
주민들은 개바위천 옆 양지바른 들판에 묘를 써주고 유언에 따라 기일이면 온동네 주민이 모여 제사를 받들었다.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순박한 인간애는 마을의 전설로 승화됐다.
한일합방·해방·6·25의 혼란을 겪으면서도 그의 제사는 끊기지 않았다.
그가 세상을 뜬지 90년이 흐른 지난74년 겨울 박종탁씨(53·새마을금고이사장)등 1백10가구 주민들은 그가 남긴 두마지기 논의 도조를 대대로 모은 벼80가마로 1백30만원의 기금을 마련, 마을회관을 건립키로 뜻을 모았다.
77년3월 그가 남긴 논 가운데 농암1리 165의1백96평을 대지로 조성, 건평40평 규모의 마을회관을 지었다.
회관은ㅜ「서문경회관」이라 이름지어졌다. 마을의 각종행사를 치르고 예식장으로도 대관해 그뒤 현재까지 그의 이름으로 예치해둔 회관대관료 적립금만도 1백46만원이나 된다.
그가 돌아간지 1백주년이 되는 올해 마을주민들은 또 그의 총각귀신을 위로해주기 위해 영혼결혼을 추진하고있다.
『슬하에 피붙이 하나없이 평생을 홀아비로 살다간 그 어른의 총각귀신을 면해주기 위해 신부감을 찾고있다』고 이장 김문영씨(47)는 말했다. 11월9일(음력10월17일) 기일에 마을개발위원10명이 제관이돼 동제를 지낸 뒤 영혼결혼식을 올릴계획이란다.
주민들은 또 그의 덕행을 기록한 「서문경행장기」를 발간할 준비도 세우고있다. 한사람의 씨앗이 무성한 숲으로 자라는 모습이다. <문경=이용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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