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널은 붐벼도 시청자는 한산|유럽 TV방송계를 돌아보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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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유럽TV방송의 특성은「재미없는 방송」이었다. 일일연속극도 없고 휘황찬란한 쇼무대도 없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방송은 생활을 지배하는 절대적 존재가 아니라 단순히 여러가지 상대적인 존재들중 하나일 뿐이었다.
유럽방송이 재미없게 여겨진 가장 큰 원인은 토크프로그램이 주류를 이룬데 있었다.
『프랑스 텔리비전은 온통 대담뿐』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프랑스 TV프로는 TF1 안테나2, FR3을 막론하고 토론의 천국이었다.
평일에는 정오부터 밤11시30분까지, 토·일요일에는 아침10시부터 자정까지 방송하고 있는데 심야의 영화프로그램도 적당한 토론거리(?)가 없을 때나 방영할 정도였다.
쇼프로그램 역시 1주일에 한번 내보내고 있었으며 젊은이를 위해「마이클·잭슨」등 팝스타들의 비디오 클립을 매일밤 30분씩 방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정말 프랑스TV가 재미없는 것은 아니었다. 바로「재미없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가장 재미있는 것」이었다.
이 묘한 아이러니가 곧 한국식 TV중독증 환자와 유럽식 TV시청자와의 차이였다.
파리에서 가장 인기 높은 프로는『문학토론회』였는데 이 프로그램은 낮 방송시간에 재방송도 하고 있었다. 문학작품에서 사회성을 띤 화제거리(동성연애·암·영화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를 포함, 대형으로 꾸며지는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에 재미를 불러일으키는 핵이 바로 진행자의 해박한 지식, 날카로운 분별력임을 알고 나서 프랑스인들이 그토록 토론에 심취하는게 수긍이 갔다.
과연「명사회자」는「명프로그램」을 만든다.
유럽인들에게 있어 TV란 여러가지 상대적인 존재들 중의 하나임을 단적으로 느끼게 해준 곳은 이탈리아였다.
이탈리아 전역에는 6백여개의 TV방송국이 있고 로마에만도 26개의 민방채널과 공영방송인 RAI 1·2·3등 29개나 되는 그야말로「전파정글」속의 나라였다.
TV수상기의 채널수는 16개가 한계여서 따로 단추를 부착, 1', 2'식으로 해서 겨우32개의 채널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였으며 채널마다 전프로그램에 자국의 심벌을 집어넣을 정도로 아우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생활에 미치는 TV의 영향은 무색할이 만큼 미미했다.
이탈리아 TV의 골든아워는 밤8∼9시로 다른 나라에 비해 1시간이나 적었다. 이탈리아인들의 취향은 먹고 얘기를 나누는 것으로 저녁식사가 시작되는 밤9시 이후에는 도대체 TV시청이란 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TV의 역기능으로 사회문제가 심각하다는 논의는 벌어지지도 않고 있으며 무질서인듯 보이는 이 나라에서 날치기는 많아도 강도는 없다는 사실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시청자들을 사로잡아 지배하기를 거부하는 방송의 여유로움, 그리고 그 안에 깃든 비판의 자유로 인해 방송의 질은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기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홍은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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