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선 지금…|농사는 누가 짓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서울의 이상비대 속에 지난 20여년간 상대적으로 위축되고 소외되어온 농어촌과 지방도시 문제가 새삼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근대화의 깃발아래 절대명제로 추구해온 산업화는 지나친「중앙집중」으로 대한민국 안에 「서울공화국」을 탄생시켰으나 그와 함께 서울에 눌리고 뒤진 「지방공화국」에도 의식과 문화의 엄청난 변화를 가져왔다. 이제 우리의 지방도시·농어촌은 60년대의 그런 전통사회는 아니다. 혁명적 변화는 지금도 진행 중에 있으며 그 속도는 더욱 빨라질 수밖에 없다. 소외 속에 변화와 진통을 겪고 있는 농어촌과 지방도시, 「과거」의 그늘과 「미래」의 햇살이 엇갈리는 그 현장에 중앙일보가 연속, 심층취재의 눈을 돌린다.
『신월주민 여러분 농번기 영농준비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십니까. 조성면장 정인석입니다. 올해는 냉해가 예상되고 6월 하순부터 장마가 시작된다는 기상당국의 예보입니다. 보리베기·모내기를 서둘러 시한영농에 차질이 없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 군의 경우 모내기는 6월20일까지, 늦어도 25일까지는 끝내야 합니다. 일손이 부족한 농가에서는 이장을 통해 지원을 요청해주시면 가능한대로 학생 등 지원인력을 도와드리겠읍니다. 보리베기를 서둘러 모내기를 앞당깁시다.
곡창 호남에서도 맛좋은 쌀 「득량미」산지 전남보성군 득량들-. 새벽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10리 벌판의 한쪽 조성면 신월리 마을에 요란한 스피커 소리가 정적을 깬다. 아침 5시30분, 면장 정인석씨(54)의 시한영농 독려방송. 『농민들이 알아서 할 일이지요. 그러나 농민들에게만 맡겨놓아서는 때를 놓치는 경우도 생기고 증산목표를 달성하자면 역시 독려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농사를 누가 짓는가」 어리석은 질문일지 모르나 실제로 우리 나라 농사는 농민과 함께 면장·군수가 짓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식량증산을 목표로 「시한영농」이란 이름의 돌격작전식 행정지도농업이 20여년째 우리 농업의 한 관행으로 자리잡았다.
『면사무소·농촌지도소·군청직원들 참 고생합니다. 말이 좋아 공무원이지 농사철에는 상머슴이라….』
경북 상주에서 만난 농부 박승철씨(47·상주군 청리면 원장리)는 숫제 공무원들을 「머슴」이라고 불렀다.
「논두렁 출근, 논두렁 퇴근」 「앉았다 하면 회의, 섰다 하면 출장」-. 농사철 군·읍·면 공무원들의 신세타령이다. 농사를 농민보다 관청이 앞장서 짓는 행정풍토를 한마디로 드러낸다.
관치영농의 일선집행에는 군·면의 행정기관 외에 농촌지도소·농협·농지개량조합이 직·간접으로 간여하고 있다.
이들 5개 기관은 유기적으로, 때론 독자적으로 1년 내내 쉴새 없이 농민들의 농사를 지도·감독·독려한다. 그 지도·감독은 영농의 전분야에 미쳐 있다. 그 중에도 역점은 쌀·보리 주곡의 증산.
군의 경우 요즘 도 등에서 내려오는 농산관계 공문(공문·전통·TT)이 하루 평균5∼6건, 많을 때는 10건도 넘는다. 이를 읍·면에 내려보내고 그 보고를 받아 종합해 도에 보고 하는 등 2명의 직원이 매달려 문서처리하는데만도 정신이 없다.
보리베기실적, 인력동원실적, 병충해방제 농약수급계획, 하곡수매가능량조사, 농어민 후계자 사후관리….
군은 간부들이 읍·면을 나누어 담당하고 읍·면은 직원들이 3∼4개 부탁을 담당, 농사철 내내 「현지지도」 출장이다. 면직원의 경우 1년 중 출장이 통상 2백일 이상. 시한영농의 차질로 면장·군수 등이 견책·파면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다.
이같은 관치영농은 20여년 동안 농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식량생산을 늘린 것이 사실이나 역기능 또한 적지않다.
무엇보다 농민들의 의타심. 「높은 분들」들의 시찰이 잦은 철도·고속도로·간선국도변은 으례 모심기를 관에서 해주는 것으로 인식돼 있다. 일선 읍면장·군수들 이상급자의 지적을 받을까봐 학생 등을 동원, 1차로 모심기를 해주는 것이 관행이 돼 농민들은 손을 놓고 앉아 있기가 예사.
지난 5일 경남 창령군은 창령읍 여초리 국도변 2모작논의 보리베기에 인력을 동원했다. 정작 주인은 출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다 끝날 무렵에야 나타나서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읍에 볼 일이 있어 다녀왔다』는 인사.
부산∼진해간 해안관광도로변인 웅천·웅동지역도 이 같은 관청 모심기 상습지역으로 지난해 주민들이 보리베기를 게을리하자 진해시에서는 『이 지역은 자율영농이 잘 안되는 곳』이라는 팻말을 길가에 박아 망신(?)을 주려고까지 구상했다가 너무 심하다는 의견 때문에 보류했다.
창령군은 올해 관의 눈치만 보고 있는 구마고속도로주변과 부곡온천장주변 부실경작자를 조사, 1백30가구에 대해서는 관의 인력동원을 해주지않기로 결정했다. 경북 영천군도 올부터는 국도변모심기지원을 폐지, 원호가족 등 일손이 정말로 필요한 가구를 우선 지원키로했다.
이 같은 변화는 정부가 지난해부터 관치영농의 부작용에 눈을 돌려 자율영농으로 방침을 전환하면서 나타난 것이다.
관치영농의 부작용은 또 지도기관의 중복에다 전문성의 결여로 농민들에게 불신을 조장하는 경향.
영농지도에 나서는 기관은 5군데이나 이 중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농촌지도소뿐. 「선무당이 사람 잡는」 경우가 그래서 없지 않다.
경북 예천군 진문면 수계1동 이용수씨(48) 등 마을주민들은 『못자리설치·모내기·보리파종·보리베기 등에 군경·읍·면·농촌지도소 등 5∼6개 기관이 영농지도를 펴고 있으나 근무관청이나 지도하는 사람에 따라 모내기·벼포기수·비료 주는 양을 제각각으로 일러주는 등 혼선만 빚고 있다』고 지적, 지도 창구의 단일화를 군에 건의하기도 했다.
행정지도는 최근까지 벼품종의 선택조차 농민들의 자유의사를 막았을 정도. 이는 통일계 다수확품종의 재배를 늘려 식량증산을 꾀하려는 의도였지만 농민들의 불평을 사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지난해엔 재배만 권장해 놓고 추곡수매를 다 못해 농민들이 남은 통일벼 쌀을 싼값에 시중에 내다 팔고는 『사주지도 않으면서 권장은 왜 하느냐』는 불평들을 했다.
올부터 볍씨선정이 농민들의 자유의사에 맡겨지자 일부지역에서는 일반벼를 더 많이 심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통일벼보다 수확은 적더라도 시중에 좋은 값에 팔아 실제 소득을 더 올릴 수 있다는 계산 때문.
경북 안동군 풍산읍 일대에서는 경지정리까지 한 5개 지역 10만평의 논에 농민들이 벼대신 수익성이 더 높은 수박·채소·마늘 등 특용작물을 재배하는 예까지 나타나고 있다.
이윤 추구의 경제 동기에서가 아니라 주곡을 싼값에 공급하기 위한 정책의 관점에서 농업을 추구해온 관치영농이 그 자체의 모순에 대한 반성에서 자율로 전환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농민들이 「수지맞는 농사」의 의욕을 가질 수 있는 농업의 장기전략은 제시되지 않은 채 관치에 길들여진 의타의 앙금만 곳곳에서 눈에 띄는 농촌의 오늘이다.

<특별취재반>
◇호남
▲모보일 차장 ▲박근성 기자 ▲김국후 기자 ▲허남진 기자
◇영남
▲김재봉 차장 ▲이용우 차장 ▲문병호 기자 ▲엄주혁 기자
◇중부
▲고정웅 차장 ▲박상하 기자 ▲권혁룡 기자 ▲김정배 기자 <이상 사회부>
▲김주만 기자 ▲최재영 기자 ▲장남원 기자 ▲장충종 기자 <이상 사진부>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