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리시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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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아침 일찍 시내에 볼일이 있어 나갔다가 돌아오는데, 아차하는 사이 버스에서 내릴 기회를 놓치고 한 정류장을 더 가버리고 말았다. 그런데도 뭐 별로 억울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까운 길을 취하기 위해 논둑을 따라 퐁당퐁당 논물에 뛰어드는 개구리를 보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역시 시내로 나갔다가 돌아오는 버스에서 어제와 같은 바보짓을 안하려고 간혹 마음을 도사렸는데, 웬걸 이번에는 두 정류장이나 앞서 내린 것이다. 할수 없다는 생각을 하며 짐을 든채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내 자신에게도 화낼줄 모르고 쉽게 체념해버리는 것이 서글프긴 했다. 두 정류장뿐만 아니라 집에 닿으려면 한참을 더가야하는데 거추장스런 짐까지 들고, 다시 버스에 올라 타 궁리도 해봄직한데 휘적휘적 걷는 내자신, 신열과도 같았던 그 숱한 분노, 전율하던 의지, 정녕 그런 것들을 이제는 다 상실했는가.

<한마리의 벌레가 된 듯>
논둑길과는 달리 이발소, 식료품, 부동산중개, 건축자재, 식당, 그런 간판들과 낡은 공장건물옆을 을씨년스럽게, 아침 공기가 서늘해 두터운 옷을 입고 나갔기에 햇빛이 따가와지면서 땀을 흘리는 내 몰골하며, 흡사 구멍난 투구에 창은 부러지고 말을 잃은 노병사나, 더듬이 잘린 한마리의 벌레가 되어 내가 가고 있는 것만 같다. 비애라 할까, 적막라 할가, 그런 것이 저항도 반발도 없이 전신에 스민다. 오늘은 이 즐비한 간판들이 현실이다.
논물에 뛰어드는 개구리는 곁코 현실이 아니다. 빨리 내 성으로 달아나야지 느닷없이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내 성안에도 간판을 필요로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었다. 봄에 퇴비를 듬뿍듬뿍주어서 나무들은 싱싱한 것 같았지만 헤치고 보니 가지사이사이에 수많은 벌레들이 달라붙어서 나무들을 괴롭히며 나를 비웃고 있었다.
키가 낮은 회양목이나 채소는 해마다 겪는 일이어서 차후 한차례 돌아가며 벌레를 잡아주지만 손이 닿지도 않거니와 수많은 나무들을 내 두 손으로 감당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이사온지 5년-. 처음 농약을 한번 뿌리고는 용하게 버티어 왔고 채소나 과수·정원수들은 모두 건강하게 자라주었는데 퇴비로 지력을 북돋워주는 것 만으론 안된단 말인가. 분무기와 농약을 사러 나가는 내 마음은 우울하고 절망적인 것이었다.
농약상점에는 소형으론 어깨에 메고 조작하는 것 밖에 없었다. 자신이 없었으나 농약과 분무기를 사들고 돌아오니 하루 걸러서 나를 도와주러 오는 아주머니가 화를 벌컥 내는 것이었다. 그 표정은 말 안듣는 아이를 쥐어박는것 같은 그런 것이었다.
『나중에 어쩌려고 이러시오. 너무 몸 생각을 안해요! 이걸메고 어떻게…. 』『아, 아주머니, 조금씩 넣고 하면 되쟎아요』『아무 말씀 마시고 바꿔오세요. 내가 젓고 선생님은 다니면서 뿌리고, 긴 호스가 달린 그것말입니다. 원, 남정네들이나 그걸메고 하지.』

<웬지 이방인같은 기분>
내쫓기다시피 나는 집을 나왔다. 평소에도 집에 풀나게 안할테니 제발 들어가라고 등을 밀다시피 했던 아주머니였다. 농약상점에서는 농부의 아낙도 아니요, 손은 막일에 거칠어지긴 했어도 차림새는 도시풍인 나를, 더군다나 여자인만큼 좀 짐작이 안간다는 분위기였다. 나름대로 서투르게 더듬더듬 설명을 하고 있자니까 이방인만 같아 뭔지 모르지만 목이 메는것 같았다. 아뭏든 두사람이 조작한다는 그 분무기로 바꾸기로 결정하고 상점의 청년이 조립을 시작했다. 무식한 나는 그 조립의 과정이 매우 복잡한것 같아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두려움을 삭이느라 택시가 누비고 지나가는 시장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흐르고분무기의 조립은 뭔가 잘못되었는지 여간해서 끝나지 않았다. 끝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시험을 하면 엉뚱한 곳에서 물이 터지곤 한다.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장사하는 분에겐 안됐지만 이래가지고 어찌 살겠어요. 농약이 안팔리는 세상이 될 수 없을까.』
청년은 내 어리석은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또 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안되겠어요. 복잡한것 나 못해요. 이거 도로 가져갈래요.』
바꾸려고 가져간 것을 집어들었다. 상점에서는 고장나거든 가져오라며 친절히 말하고 조립하던 것에서 손을 놓았다.
정말 할수 없는 일일까. 돌이킬수 없는 일일까. 내 뜰안에서만이라도, 했었던 노력은 그야말로 태산을 성냥개비 하나로 떠받치려 했던 것이었을까.
경운기 소리가 요란하다. 논에 모를 심는 농부들의 모습이 내 방에서 보인다. 손바닥만한 땅에 경운기를 마구 들여다 놓고 산간 형편을 개탄하며 산유국의 왕이 형님이라도 석유를 못당할 것이다-. 귀농한 어느 퇴역법관이던가, 그분이 쓴글이 생각난다. 희뿌연 하늘, 오늘따라 치악산이 내게는 아름답게 느껴진다.

<마음은 먼산에 기울어>
간밤에 내린 비 탓인지 보송보송 수목이 우거진 산허리가 무척이나 부드러워 보인다. 평소 냉담했던 내 마음이 먼산에 기우는 것은 아마 가까운 곳에 눈을 감고 싶은 심정때문일까. 내 힘이 쇠하고 내목구멍에서 소리가 굴려 없어지는 때문일까. 진실로 역리의 힘이 이다지도 거대한 것을 깨닫지 않았던 것도 아니었으련만. 가꾸면 생명은 자란다. 그 믿음이 무너지는 소리가 오늘따라 더욱 높게 들려오는 때문인지 모르겠다.
선도하는 것이 있어서 무리를 지어 따르는 연못의 고기떼들이 실로 부럽구나. 저 광활한 장천에 폭풍과 기아가 도사린 머나먼 여로, 종류가 다른 철새들을 이끌며 날으는 한 마리 도요새의 유순한 용기를 우리는 어디서 찾을꼬.
그러나 나는 털고 일어난다. 어제 농약을 뿌려다가 내동댕이친 분무기는 본체만체 나무로 다가갔다. 높은 가지를 휘어잡고 벌레를 잡기 시작했다. (초조해하지 말아라. 지나치면 되돌아오고, 못미치면 더 걷고, 인간은 아무도 종말을 보지 못한다. 오로지 과정이 있을 뿐…. 뛰지말고 걸어가면서 계속하자. 일이 보배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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