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mily] 미운 늦둥이 퇴직 남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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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권씨뿐이 아니다. 퇴직한 남편 수발에 고통을 호소하는 주부가 의외로 많다. 황혼이혼이라고 하면 젊은 시절 남편의 무관심이나 폭력.바람기 때문에 아내가 요구하는 것으로만 생각하지만 남편의 퇴직도 주요한 요인이다. 한집에 살면서도 완전히 다른 생활을 하던 부부가 하루 온종일 얼굴을 맞대게 되면서 신혼 때처럼 사사건건 부부싸움을 해 사이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먼저 고령화사회를 맞은 일본에서는 아예 '은퇴한 남편 증후군'(RHS.Retired Husband Syndrome)이란 말까지 있을 정도다. 할 일 없는 남편들이 아내가 매 끼니를 챙겨주길 바라며 집안일 간섭하는 걸로 시간을 보내다 보니 그 스트레스 탓에 정신과 치료까지 받는 노년 여성들이 늘면서 생긴 말이다.

노후대책으로 재테크뿐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는 심(心)테크가 필요한 것도 이 때문이다. 남편의 은퇴를 경험한 퇴직 가정 구성원들은 "준비된 퇴직이든 아니든 일단 퇴직을 하게 되면 심리적 충격이 상당하다"며 "퇴직교육이 절실하다"고 입을 모은다. 그러나 우리의 노후대책은 아직 재테크나 건강관리도 급급한 실정이다.

*** 끼니 해결이 가장 큰 문제

수저통에서 수저 찾는 데 한 달
그릇 싱크대에 갖다 놓는 데 1년? 허걱!

매일같이 남편 점심상 차려주느라 한동안 못 만났던 친구를 만나러 혼자 외출하면서 상을 차려놓고 나갔던 주부 서모(56)씨는 집에 돌아와 밥이 그대로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왜 밥을 안 먹었느냐"는 물음에 남편 답이 더 걸작이었다. 수저가 어딨는지 몰라 못 먹었다는 것이다.

늘 그 자리에 놓여 있는 수저통에서 자기 수저를 찾지도 못하는 남편을 보고 앞으로의 생활이 막막해졌다. 실제로 이 남편은 수저통에서 수저 찾는 데 한 달, 자기가 먹은 밥그릇을 싱크대에 갖다 놓기까지 1년이 걸렸다.

퇴직한 남편이나 그 수발을 드는 아내 모두를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바로 '밥'문제다. 밖에서건 안에서건 남들이 코앞에 들이미는 밥상만 받아본 남자들일수록 끼니를 혼자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 탓에 점점 더 아내에게 의지하게 된다. 말이 좋아 의지지 불안해서 아내를 옆에 붙잡아 놓는 것이다. 퇴직 스트레스에다 이렇게 기까지 꺾여 우울증으로 도지는 경우도 적잖다.

*** 주부도 은퇴하고 싶다

백수 티 안 내려 집에만 있는 남편 수발
찜질방 못 가, 친구들과 전화 수다도 못해

퇴직자 아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스트레스 받는 남편이 한편으론 이해가 되면서도, 노년에 다시 찾아온 '남편 시집살이'에 고통스럽다. 우리나라 주부들은 낮에 모임이 많아 사회생활하는 남자들 못지않게 바쁘다. 이렇게 살던 아내가 하루아침에 집안에 들어앉아 남편 잔심부름에 잔소리까지 듣자니 쉬울 리가 없다.

주부 박모(55)씨는 "전에는 남편이 출근만 하면 하루종일 찜질방에서 살든 말든 간섭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젠 무슨 특별한 용무가 아니면 외출하기가 쉽지 않다"며 "집에서도 남편 눈치에 친구들과 전화로 수다도 못 떠니 감옥이 따로 없다"고 말한다.

한순간 자유가 사라진 것도 참기 어려운데 손가락 하나 까딱 안 하는 남편은 더 못 견딜 일이다. 백수 티 내지 않으려 낮에는 꼼짝 않고 집에만 들어앉아 전화도 안 받는 남편 때문에 속에서 열불이 난다는 아내가 많다. 아예 남편이 없으면 모를까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전혀 안 돕고 오히려 성가시게 하니 '꼴 보기도 싫다'고 아우성이다.

아내들은 "남편들은 아내에게 이 정도쯤은 대접받을 권리가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지만 아내들도 힘들다는 걸 알아주면 좋겠다"고 호소한다.

*** 노후 재테크? 심(心)테크부터

요리.청소…하나하나 배우려는 자세를
일본선 남편 자립 돕는 프로그램 수천 개

몇십 년을 함께 산 부부라 해도 퇴직 후의 부부관계는 전과는 전혀 다르다. 생활패턴이 완전히 달라지는 데다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도 판이하게 바뀌기 때문이다. 함께 사는 방법을 새로 배워야 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아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퇴직 남편상은 '자립형 남편'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은퇴한 남편의 자립을 돕는 재교육 프로그램이 수천 개나 있다. 재취업이나 재테크 등 거창한 재교육이 아니라 집에서 남편 스스로 할 수 있게 요리와 쇼핑.청소 등을 가르치는 것이다.

"가족을 위해 평생 뼈 빠지게 일했는데 이제 살림까지 배우라는 거냐"며 반발할 수도 있겠다. 이럴 때는 우선 뭔가 할 일을 만들어주는 게 좋다. 공과금 내는 일 등 아내가 하던 일 가운데 자존심 상하지 않을 만한 일을 골라 남편에게 맡기는 것이다.

전화 받기 싫어하는 눈치면 아예 툭 까놓고 "낮에 온 전화는 내가 받겠다"는 배려도 필요하다.

대한은퇴자협회 주성룡 회장은 "까스불 조심하고, 불조심하고, 지퍼 조심하고, 마누라 찾아 징징대지 말 것이며, 라면이나 끓여먹고 있으라는 일명 '까불지마라'식의 아내 때문에 위축된 남편이 많다"면서 "남편에게 당장 뭔가 하라고 다그치기보다는 기다려주는 자세도 필요하다"고 조언한다.

취미를 찾아 집 밖으로 나가든, 아니면 집 안에서 스스로 할 일을 하든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안혜리 기자 <hyeree@joongang.co.kr>
일러스트레이션=강일구 <ilg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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