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으랏차차 '88세 청년' 41. 손기정씨 삭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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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삭발한 채 방콕에서 돌아와 귀국 보고를 하는 손기정 아시안게임 선수단장.

우리나라가 아시안게임에서 종합 2위에 오른 것은 제5회 대회(방콕)가 처음이다. 광복 후 참가한 국제대회 가운데 성적이 가장 좋았다. 또한 우리는 이 대회에서 1970년 아시안게임을 유치했다. 66년 12월 24일 오전 9시, 대한민국 선수단의 귀국은 개선임에 분명했다. 그런데 비행기 트랩에서 내리는 손기정 단장의 표정은 어두웠다. 머리는 삭발하고 있었다. 30년 전 베를린올림픽(36년)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의 식민지 청년으로서 비애로 가득 찬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손 단장은 육상 영웅으로서 요즘으로 치면 수퍼 스타였다. 스타의 삭발은 금방 화제가 됐다. 그는 "방콕에서 물의를 일으킨 데 대한 속죄와 육상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둔 데 대한 자책의 뜻"이라고 '삭발의 변'을 밝혔다. 그러면서 손 단장은 "앞으로 어떤 대회이건 나처럼 권력 없는 사람이 단장으로 파견될 경우 모두 머리를 깎고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묘한 말을 남겼다. 나는 그의 뜻을 알았다. 대회 기간 내내 그는 "학부모 등쌀에 시달리는 초등학교 담임 교사의 심정"이라고 토로했던 것이다.

방콕대회는 내게 두 개의 표정을 지녔던 대회로 기억된다. 한편에 승리의 기쁨이, 그 반대편에 우리 능력의 한계와 극심한 분열상을 깨닫는 아픔이 있었다. 대회 중 몇몇 국내 언론이 보도한 대로 대한체육회와 대한올림픽위원회(KOC) 간 갈등이 심했다. 우리 선수단은 체육회와 KOC로 이원화된 조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방콕에 도착한 뒤 능률을 높이기 위해 통합 조직을 구성했다. '시너지 효과'를 기대한 이 조직은 불행히도 집단 이기주의에 빠져들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KOC의 허물이 컸다는 것이 나의 시각이다. KOC는 선수단 안에 '행정본부'라는 별도 조직을 두어 선수단 전체를 장악하려고 했다. KOC의 활동은 아시안게임 자체보다 차기 대회 유치에 집중됐다. 체육회와 불협화음을 낼 소지가 많았다. 선수단 관리, 경비 지출과 관리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잡음이 났다. 갈등은 갈수록 심각해져 손기정 단장의 보좌관이 단장의 명령을 무시하고 행정본부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다 해임되는 일도 있었다.

모든 책임을 KOC에만 돌리고 싶지는 않다. 코치들의 연판장 소동은 일선 체육인들의 소양이 부족했음을 보여준다. 그들은 "지도자가 선수와 똑같이 일당 3달러를 받을 수 없다"며 항의 시위를 했다. 이들은 일당을 6달러로 인상해 주기로 하자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들을 몹시 괘씸하게 생각했다. 처우 불만을 표현하는 그들의 방법은 옳지 않았다. 나중에 육상 코치 두 명이 소동의 주동자로 밝혀졌다. 그 중 한 명은 며칠 뒤 테니스 코치와 선수촌에서 난투극을 벌여 구경거리가 되었다.

손기정 단장은 나를 만날 때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고민을 털어놓았다. 단장의 승인 없이 예산이 집행되는가 하면 국회의원이나 각종 경기단체장들이 단장을 제쳐두고 공식 석상을 누비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엔 나도 체육회장이라는 허울좋은 직함뿐, KOC 중심으로 돌아가는 선수단 안에서 행사할 권한이 없었다. 개회식이 열렸을 때 본부석에는 대한체육회장의 자리가 없었을 정도다. 대회 기간 내내 어떤 세미나나 리셉션에도 초대받지 못했다.

체육회장이자 정치인인 나의 눈에는 우리 선수단의 분열과 그것을 조장한 매커니즘이 훤히 보였다. 이 열등한 집단이 아시안게임 종합 2위와 아시안게임 유치라는 두 가지 목표를 모두 달성했으니 천우신조랄 밖에.

민관식 대한체육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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