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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 '환갑'에게 사망을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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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경제부장

재판장: 피고 환갑에 대한 선고 공판을 시작한다. 피고, 이름과 생년월일을 대시오.

피고: 돌아올 환(還), 갑옷 갑(甲)이라 하오. ‘갑을병정’으로 시작하는 10간과 ‘자축인묘’로 시작하는 12지를 한 자씩 따서 해의 이름을 짓지 않소. 올해는 을미(乙未)년이지. 이런 조합이 60개, 육십갑자라오. 누구든 만 60세가 되면 태어난 해와 같은 갑자를 만나지. 돌아온 갑자, 바로 환갑이오. 글쎄 나이는 가물가물하오만. 조선 초 역사서에 내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로 봐선 족히 700살은 넘은 듯하오.

재판장: 피고가 태어날 당시 사람 수명이 얼마나 됐소?

피고: 조선 왕의 수명이 기껏해야 40대 중반이었으니 평민이야 30줄이었지. 환갑 맞은 사람이 오죽 귀했으면 동네잔치를 했겠소.

재판장: 피고의 죄, 이제야 깨달았는가.

피고: 환갑잔치가 어찌 죄가 된단 말이오?

재판장: 기대수명이 80을 넘긴 게 7년 전이오. 사고나 재해를 당하지 않으면 100세까지 사는 세상이지. 피고가 태어난 시대로 환산하면 60은 청년이오. 한데 피고로 인해 60이 되는 순간 노인으로 낙인이 찍히지 않소. 멀쩡한 사람을 뒷방 늙은이로 전락시키니 혹세무민(惑世誣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피고 때문에 일자리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일용직을 전전하고 있소. 반퇴(半退)시대의 덫, 바로 피고요.

피고: 요즘 환갑 찾아먹는 사람이 어디 있소. 나야 끈 다 떨어진 퇴물 된 지 오랜데.

재판장: 가증스럽군. 환갑잔치는 사라지고 있으나 피고의 세도는 여전한 걸 모를 줄 알았나. 59세까지만 불입을 허용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대표적이지. 60 넘어도 일하면서 더 불입하고 나중에 많이 타먹고 싶어도 안 된단 말이오. 치매나 노안 검진도 60세부터 공짜야. 몸은 팔팔한데 65세 넘으면 지하철도 공짜로 태워줘. 반면 환갑 지나면 보험도 맘대로 가입하지 못하게 해. 실직자에게 주는 구직 급여도 64세까지 제한해. 65세 넘으면 구직도 하지 말란 건데 이 모든 게 피고로 인해 굳어진 제도와 관행이 아니냔 말이오.

피고: 먹고살기 팍팍한데 환갑까지 일한 사람 혜택 좀 받으면 안 되오. 너무 쩨쩨하네.

재판장: 내후년이면 환갑 이상 인구가 1000만 명이 넘어간다는 사실 알기나 하오. 더구나 올핸 한국의 베이비부머 세대 첫 주자인 1955년생이 환갑이 돼. 앞으로 30년 동안 해마다 80만 명 안팎의 환갑 쓰나미가 닥쳐오지. 2040년엔 60세 이상 인구가 40%를 넘소. 국민 셋 중 하나는 지하철을 공짜로 타고 다니게 돼. 지하철공사는 땅 파서 장사하겠소. 천문학적 적자는 결국 국민 세금으로 메울밖에. 환갑을 기준으로 삼은 제도·관행은 더 이상 지탱할 수가 없소. 700년 전 농경사회 유물인 피고의 잔재를 이젠 씻어낼 때가 됐단 말이오.

피고: 정년 연장이 안 되는 게 어째 내 탓만이오. 해마다 나이만 먹으면 자동으로 임금이 오르도록 한 연공서열 임금체계, 누가 만들었소? 개발연대 당신네가 만든 거 아니오. 기업이야말로 땅 파서 장사하나. 정년 늘어나면 누굴 먼저 자르겠소. 호봉 꽉꽉 눌러 채운 고참이지. 오래 일하고 싶으면 이거부터 뜯어고치시오. 공연히 나만 못살게 굴지 말고.

재판장: 오랜만에 입바른 소리군. 나이 차별을 없애자면서 임금은 나이에 비례해 받겠다는 건 자가당착(自家撞着)이오. 그 점은 정상 참작하겠소. 마지막으로 남길 말은 없소?

피고: 내 나이 700이면 살 만큼 살았소. 예전처럼 내가 찾아왔다고 동네잔치 해주는 집도 이젠 없소. 오히려 반퇴시대 공공의 적이라니 세월이 무상할 따름이오.

재판장: 비록 피고로 인한 폐해가 극심하다 하나 낡은 제도·관행을 고치지 못한 책임, 피고에게만 묻기 어렵소. 세간의 풍속에선 이미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피고에게 새삼 사형을 선고해봐야 부관참시(剖棺斬屍)라 할 것이오. 하여 다음과 같이 선고한다. 피고 환갑에게 사망을 선고한다. 다만 700년 동고동락(同苦同樂) 해온 정리(情理)를 참작하여 유해는 미풍양속 박물관에 영구히 안치한다.

정경민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