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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볼테르를 읽으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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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캐나다에 온 지 이제 겨우 넉 달이 지났지만 나는 한국에서 30여 년 동안 '봤던' 장애인들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장애인을 '만났다'. 그들은 어디에나 있다. 거리에서, 쇼핑센터에서, 버스에서, 도서관에서, 전동 휠체어를 요령 있게 운전하거나 자원봉사자들의 도움을 받으며 그들은 나와 함께 살아간다. 장애의 종류가 이만큼 다양하다는 것도 새롭게 알았다. 뇌성마비와 척수마비, 시각장애와 다운증후군, 왜소증과 거인증, 자폐증과 근무력증 등등…. 나는 어느덧 장애의 종류를 분류하는 헛짓을 포기해버렸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청각장애아 학교를 겸한다. 나의 아이는 장애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수화를 배운다. 영어도 못하면서 수화부터 배우는 일이 처음에는 기막혔지만 아이가 손으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인사를 건네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나 역시 마음에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붓다의 사지육신 멀쩡한 자식 이름도 '라후라(장애)'다. 기실 그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육체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동정과 시혜라는 미명 하에 격리 수용해야 할 이유도 권리도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지난 한 달여간 한국 사회를 뒤흔들었던 '줄기세포 진위 논란'을 지켜보며 착잡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것은 '과학은 열광이 아니라 성찰을 필요로 한다'는 어느 과학사회학자의 책 제목이 무색하도록 최첨단의 과학에 가장 진부하고 고루한 감정이 개입된 것이었다. 하지만 성인 남녀 85%가 '난치병 치료가 윤리보다 우선이다'고 답했다는 여론조사와 신화를 전복하려는 '악인'들은 '격리'해야 한다는 정치인의 선동까지 접하자 착잡함은 공포와 분노의 수준에 다다랐다. 도대체 어떤 난치병 환자들을 위한다는 것인가? 난치와 불치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죄인 취급하며 이동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사회에서 누구의 행복을 위한다는 것인가? 진취적이지도 발전적이지도 않고 그럴 필요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나는 현재를 저당잡혀 개척하는 미래를 믿지 않는다. 개별적 진실을 짓밟아 얻는 '국익' 같은 것도 믿지 못한다.

어금니를 물고 볼테르를 읽는다. 그는 종교적 광신에 가장 치열하게 맞선 인물이다. "이 돌림병에 대항하는 수단으로는, 인류의 심성과 도덕을 조금씩 순화시키고 악의 창궐을 예견하는 철학의 정신밖에 없다. 이 악이 일단 번지기 시작하면, 도망가서 공기가 다시 정화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시 읽는다. "관용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류가 가진 가장 멋진 재능이다. 우리는 모두 약점과 오류덩어리다. 그러니 우리 모두 서로의 어리석음을 용서하자. 이것이 첫 번째 자연법칙이다."

김별아 소설가.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