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하의 『밝고 따뜻한 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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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소설이 근대적인 문학 장르로서 힘을 발휘할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근대적인 삶의 양상과 닮은 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었다.
근대 이후의 개인의 삶이란 지식이나 권력이나 명예에 있어서 <힘의 소유>를 지향하는 것이어서 그것과 관계되지 않는 것은 모두 도외시되고 무의미화되어 버렸던 것이었다.
산업혁명 이후 더욱 가속화된 이러한 <힘>의 추구는 개인의 욕망을 소유와 과시의 극대화 쪽으로 나아가게 함으로써 개인으로 하여금 갈등과 불행 의식 속에서 헤매게 만들었다. 소설이 근대적 장르로서 각광을 받게 된것은 바로 그러한 갈등과 불행속에 있는 개인을 그릴수 있는 <유일한>장르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소설의 보다 큰힘은 개인의 삶이 거짓된 욕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드러내는 반면에 그 개인의 내면에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망각된 상태로 있는 <진정한 어떤 것>의 존재를 이야기하는데 있는것이다. 개인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가 만들어 놓은 가짜욕망을 추구하면서도 스스로의 내면에서는 그것 아닌 진정한 것에 대한 욕망을 무의식의 상태로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동하의 「밝고 따뜻한 날」(『문학사상』5월호)은 개인의 내면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것을 드러내 보임으로써 소설의 기능이 무엇인지 이야기해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이 작가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간난의 문화>라고 이름 붙일수 있는 것이다.
거의 모든 그의 작품의 주인공은, 소년시절에 6·25를 겪은 한국인의 보편적인 삶이 그러했던 것처럼, 궁핍의 추억과 가난의 콤플렉스를 지니고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의 주인공들의 삶에서 결정적인 순간을 지배하는 사유의 양상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도 동일한 체험이 서술되고 있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든 그의 주인공은 자신의 삶이 바쁠수 밖에 없었던 네가지 단계를 발견함으로써 현재의 자신에게 결핍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된다. 그 첫번째 단계인 10대초에는 <만성적이다시피한 기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부지런을 떨어야했고, 20대를 전후로 해서는 왕성한 지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바쁘게 살아야했으며, 20대 중반에는 자신의 사회의식을 실현하고자하는 욕망으로 바쁜 기자생활을 했고, 그후 진로 변경을하여 수출종합상사에 들어가서 <불혹의 문턱을> 넘어서도록 <휴일없는 캘린더처럼> 쉬지 않고 살아왔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생존의 욕망으로부터 출발하여 지식의 욕방, 실천의 욕방을 거쳐 축재의 욕망에 이르는동안 자신의 삶에 아무런 반성적인 의식이 있을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어느날 마당에서 발견한 <구슬>무더기를 통해 잊혀진 과거를, 가난한 시절의 자신의 진실을 발견하게 된다다. 그러나 그 발견은 바로 <잃어버린 시간>에대한 프루스트적 탐구로 확대되는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자신에게는 현재적 삶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진실의 발견이었지만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일시적 호기심의 대상 이외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는다. 자신의 진실이 자기 이외의 누구에게도 더이상 진실일수 없는 현실의 발견이 그의 가장큰 절망인 것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바쁘게 살아온 삶 전체의 의미서 무화시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되찾을수 없는 잃어버린 과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찾기 힘든 절망에 관한 현대의 우화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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