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거울(변소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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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아카시아 향기가 코끝에 스미는 계절이 되면 우리집엔「이·베의식」이 행해졌다.
이렇게 햇볕 좋고 화창한 날엔 집안의 여인들이 모여 「이·베의식」이라도 치르고 싶어졌기 때문이리라.
「이·베의식」이란 다름 아닌 이불잇과 베갯잇을 빠는것.
빨고 삶고 풀하고 다려서 꿰매는 5월의「이·베의식」은 다른 계절과 한결 다른 감홍을 준다.
산더미같은 빨래도 햇볕이 좋아 하루만에 빨래에서 시침질까지 끝내기 때문이다.
할머니·어머니,그리고 수업이 없었던 날엔 나,이렇게 셋이서 각방의 이불을 끄집어내는것을 시작으로 빨래판에 비비는소리,방망이 소리는 엄마소리였고, 풀 끓이는 소리는 할머니 소리였다.
이렇게 진행이 되어가다 보면 어느새 손질된 하얀 빨랫감이 다시 마루에 수북이 쌓이게 되는데,이때 경력50년을 뽐내시는 할머니의 시침질솜씨가 등장한다.
할머니께선 내게 실을 길게 꿰어달라고 하시는데 말씀과 동시애 내가 바늘에 실을 길게(거의 내키의 2배정도)꿰어드리면 할머니께선 하하 읏으시며 옛날 눈 어두운 할미가 손자 본 김에 실꿰어달라고 하는 격이라 하셨다.
난 그 옆에서 돕는답시고 베갯잇을 꿰매는데,솔직이 고백하자면 그때 난 왼쪽 검지 손가락읕 세번이나 질렸었다.
할머니는『빠는놈,삶는놈,꿰매는놈 따로있고 덮는놈 따로있다』하시는 말씀으로 우리를 웃기셨다.
어느새 일은 거의 마쳐지고 다시 각자 각방으로 깨끗이 매만져진 이불을 들고 들어간다.
이로써「이·베의식」은 끝이 나는데 옛날 며느리가 보리 삶아놓고 베짜놓고 친정 세번 다녀올수 있는 낱씨라고 하더니만,그래도 여태 5월의 볕좋은 태양은 중전에 있었다.
이 좋은 5월이면 그때의 일들을 한번씩 생각해 보곤 한다.

<서울 강동구 석촌동 219의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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