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의 혁명구호와 청바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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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당신들이 아바나를 떠날 때는 정이 들게 해주겠다』 -기자가 LA올림픽 여자농구 프리올림픽 취재단의 한 사람으로 지난11일 공산국가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도착했을 때 프레스센터에 근무하는 한 쿠바 정부관리가 한 말이었다.
한국과는 외교관계도 없고 그렇다고 무역관계·문화교류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쿠바인들은 마치 10년 지기를 대하듯 한국기자들을 맞아주었다.
비록 패션과는 거리가 먼 옷을 입고는 있었지만 웃음을 잃지 않은 얼굴표정들, 비록 잘사는 나라의 모습은 아니지만 자연과 옛것과 새것이 갈 조화되어 아늑한 멋마저 풍기는 거리풍경, 비록 풍요로운 생활을 누리지는 못하지만 『어디를 가보아도 좋다』 고 말하는 쿠바인들의 자신만만함.
이것들은 쿠바가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들 말대로 「달러가 필요」해서인지는 몰라도 아바나시내의 호텔에는 미국·서독·프랑스 관광객들로 들어차고 영화관과 TV에서는 자본주의국가에서 만든 작품들이 방영되고 있었다.
정치적인 각도에서 본다면 집권 25년인 「카스트로」정부가 이렇게 해도 괜찮을 만큼 정치적 안정을 누리고있다는 증좌인가?
그러나 쿠바가 처해있는 경제·사회적인 고민을 본다면 평가는 달라질 수 있다.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공산국가에서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충분히 주지 못해 미국으로의 이민을 허용해야하는, 구조적인 모순을 생각한다면 쿠바정부가 폐쇄성을 벗어 던지고 서서히 탈바꿈을 하는 이유를 알만도 할 것 같다.
최근 쿠바가 국체스포츠대회·국제기구회의 등의 유치에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설명될 수 있다.
결국 「카스트로」는 혁명구호만으로 사회주의 이상을 실현할 수 없다는 현실을 깨달은지도 모른다.
달러·청바지·가스라이터를 갈구하는 쿠바 젊은이들의 그야말로 인간적인 욕구를 마냥 누르고만 있을 수는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살펴본다면 이번 여자농구 프리 올림픽에 한국기자단의 입국을 허용한 쿠바정부의 태도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는 10월 아바나에서 열리는 아마추어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때 또다시 만나자고 작별인사를 하는 LPV스포츠월간지의 「마리오」기자의 목소리가 전혀 낯설게 들리지 않았다. <이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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