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미군 포로와 만찬 '과거사 물타기' … 한·일만 빙하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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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역사 물타기’를 통해 미국을 끌어들이는 전략을 계속하고 있다. 아사히신문은 23일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포로로 붙잡힌 뒤 ‘바탄 죽음의 행진’에서 가까스로 살아난 퇴역 미군을 29일 워싱턴 만찬에 초대했다고 보도했다. 상·하원 합동 연설 직후에 열리는 만찬 자리에 초대받은 이는 일본군 포로 출신인 레스터 테니(94) 애리조나 주립대 명예교수. 태평양전쟁 초기 미군과 필리핀군 전쟁포로가 2만 명 가까이 숨진 ‘바탄 죽음의 행진’ 생존자 중 한 명이다.

 일본 과거사와 관련, ‘진주만 공습’과 ‘바탄 죽음의 행진’을 뚜렷이 기억하는 미국인들에게 아베의 일본군 전쟁범죄 피해자 초대는 상징적이다. 아사히신문은 “일본 정부가 테니 명예교수를 만찬에 초대함으로써 옛 미군 포로와 유족들이 아베 총리의 역사 인식 등에 품고 있는 우려를 불식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분석했다.

 역사 문제에서 공조를 같이하던 중국도 한 발 물러섰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서 열린 반둥회의에서 아베 총리를 만났다. 그동안 역사왜곡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 관계개선은 없다는 입장이었지만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에 일본을 끌어들일 필요성이 생기자 실용적 입장으로 선회한 것이다. 중국 관영 영자지 차이나데일리는 23일 “양국 정상의 이번 만남이 그동안 얼어붙었던 양국 관계가 회복될 수 있다는 신호를 주고 있다”고 평가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인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도 “중·일 관계를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양자의 의견이 일치했고 앞으로도 다양한 채널을 통한 대화와 교류를 반복해 관계개선의 흐름을 확실히 하자는 의사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야마타니 에리코(山谷 えり子) 일본 국가공안위원장 등 일본 각료 3명은 중·일 정상회담 이튿날인 23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다. 중·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참배를 자제하는 모습을 보이다 회담이 끝나자마자 참배에 나선 것이다. 일본이 국제사회를 향한 ‘물타기’ 전략 와중에도 역사수정주의 기조를 유지하는 셈이다. 아베 총리도 반둥회의 연설에서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한 반성만 언급하고 침략이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반성은 없었다.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20일 사설을 통해 오는 29일(현지시간) 아베 총리가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에서 전쟁의 역사를 직시할 것인지 가 일본의 진심을 알 수 있는 잣대라고 강조했다. 마이크 혼다(민주·캘리포니아)·찰스 랭글(민주·뉴욕) 의원 등은 21일 미 하원 본회의장에서 특별연설을 통해 아베 총리가 과거사를 인정하고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미국 보수 주간지 위클리스탠더드는 21일 칼럼을 통해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는 쇼와(昭和)의 날인 29일 이뤄지는 아베 총리의 의회 연설에 한국인은 물론이고 미국의 참전용사들조차 분노하고 있다”고 밝혔다.

도쿄=이정헌 특파원, 서울=정원엽 기자 jhleehope@joongang.co.kr 

◆바탄 죽음의 행진=일본군이 1942년 4월 9일부터 17일까지 9일간 필리핀 루손섬 바탄반도에서 미군과 필리핀군 포로 7만 명을 폭염 속에 100㎞ 넘게 행진시켜 2만 명 가까이 살해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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