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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을 부르고, 응어리 풀고 … '한국의 굿 : 만신들' 사진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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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사진가 김수남(58)씨는 30여 년간 굿것이 씌운 듯 굿판을 찍었다. 새마을 운동이 전통 초가집을 신식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꾸던 1970년대부터다. 조국 근대화 운동이 지상명령이던 그때, 굿은 미신 타파의 이름으로 금지되었다. 얼마나 박해와 탄압을 받았던지 김씨가 보기에 굿은 곧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는 굿을 기록해야 할 사명을 타고난 사람처럼 온 나라 굿판을 헤매다녔다.

굿은 한풀이다. 만신(여자 무당의 높임말)의 도움을 받아 원과 한을 풀며 살아갈 힘을 얻는다. 굿은 영혼을 부르는 소리다. 신을 불러들여 꼬인 현실을 해결하고 위험을 예방한다. 이런 깊은 내력 때문이었을까. 굿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굿판에 카메라 맨이 많아졌다. 귀신 들린 듯 굿을 찍은 김씨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83년부터 93년까지 만 십 년에 걸쳐 촬영한 사진 중 1000여 장이 스무 권짜리 '한국의 굿'(열화당 펴냄)으로 남았다. 큰 무당이 세상을 뜨고 자취가 없어진 굿도 늘어났지만 그가 사진으로 떠낸 굿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살아간다.

만신이 되기 위해 일월성신을 모신 뒤 무아경에서 춤을 추는 새 만신. 1981년 서울 석관동에서 담은 ‘황해도 내림굿’중 한 장면이다. 신내림을 받는 순간에 다다른 황홀한 무아 도취의 상태가 잘 드러나 있다(맨 위). 춤을 추고 축원해 가면서 일곱 고를 풀어나가는 만신. 1982년 전남 영광군 교촌리에서 찍은 ‘전라도 씻김굿’의 한 대목이다. 고가 다 풀리면 식구와 동네 사람이 망자의 한이 다 풀렸다고 기뻐한다.

경기도 양평군 사진갤러리 와(瓦)에서 열리고 있는 '한국의 굿:만신들 1978 ~ 1997'은 김수남씨의 굿 사진 90여 점을 한 자리에 모았다. 죽지 않는 우리 굿의 혼을 느끼게 하는 기 넘치는 사진전이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고 이별의 고통과 슬픔을 나누는 현장을 담은 김씨의 카메라는 그대로 한국 기층문화의, 숨소리 생생한 기록이다. 예술 비평가인 요헨 힐트만(독일 함부르크 미대 교수)은 그의 굿 사진을 "한국 샤머니즘의 문화사를 영상으로 창출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지역별로 내려오는 굿이 김씨 손을 거쳐 한자리에 모였다. 무병(巫病)을 앓고 몸에 신기가 있는 사람이 만신이 되기 위해 하는 '황해도 내림굿', 주민의 행복을 위해 벌인'경기도 도당굿', 물고기가 많이 잡히고 배를 안전하게 해 달라는 '제주도 영등굿',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을 위한 일종의 넋 건지기굿인 '수용포 수망굿', 죽은 이의 부정을 씻어 극락으로 보내는 '전라도 씻김굿', 마을을 평온케 해달라는 마을 축제 성격의 '은산 별신굿', 공동체를 위한 소박한 잔치 모습을 띠는 '서울 당굿', 풍농과 재수를 기원하는 '강릉 단오굿' 등 전국의 굿판이 사진으로 살아난다.

김씨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굿판이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한 무계급.무차별의 마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공동체 속에서 어우러져 사는 삶만이 축복임을 그의 기록은 보여준다. "굿을 찍는 일과 똑같이 굿이 지닌 여러 의미에 주목하고 공부한 뒤 무당들로부터 인정받고 있음을 느꼈다"는 그의 말을 진득한 사진이 뒷받침하고 있다.

굿이 한 사진가의 인생 방향을 바꾸어 놓았다. 더 넓은 세상과 영혼을 보고 기록하라고 등을 떠미는 굿의 정신을 김수남씨는 받아들인다. 사진기 멘 무당처럼 그는 이제 아시아의 굿판을 떠돈다. 2006년 2월 12일까지. 031-771-5454.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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