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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덕수 이씨(글 길진현기자, 사진 장충종기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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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문에서는 율곡, 무에서는 충무공」-. 덕수이씨의 긍지와 자부에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문·무에서 조선조 5백년, 아니 5천년 한겨레의 역사상 뛰어난 두인물을 배출한 덕수이씨의 자랑은 그러나 한 가문의 울타리를 넘어 온겨레의 영예요, 긍지이기도 하다.
10촌 숙질 (충무공이 아저씨뻘)사이인 두사람은 기이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나서 역사이래 일찌기 없었던 「민족존망의 한시대」에 「메시아(구세주)」의 사명을 다하고 돌아갔다.

<시조는 이돈수>
덕수이씨의 시조는 이돈수. 고려중엽 신호위중낭장의 벼슬을 지냈다고 한다. 경기도 개성근교 덕수현에 터잡아 후손들이 덕수를 본관으로 쓰게됐다.
덕수이씨가 특히 두각을 나타낸것은 조선조중엽 조선조에 1백5명의 문과급제자와 정승7명,대제학 5명, 공신4명을 낸 덕수이씨는 중종∼영조대 3백년간이 가장 융성을 누린 시기로 나타나고 있다.
이 기간에 집중된 정승·대제학등 역사에 이름을 남긴 이름을 보면 ▲이행(중종·대제학·좌의정) ▲이기 (명종·영의정) ▲이이 (선조·대제학) ▲이식 (인조·대제학) ▲이단하 (숙종·대제학·좌의정) ▲이번 (숙종·대제학·영의정) ▲이집 (영조·좌의정) ▲이은 (영조·영의정) ▲이병모(정조·영의정) ▲이유중 (선조·대사헌·청백리) ▲이안눌 (인조·예조판서·청백리)등 화려하다.
이들이 덕수이씨의 문을 대표하는 인맥이라면 무에서도 충무공을 비롯,▲이완 (인조·의주부윤) ▲이봉상 (영조·훈련대장) ▲이한응 (영조·어영대장) ▲이한풍 (정조·어영대장> ▲이인수 (순조·훈련대장) ▲이유수 (순조·훈련대장) ▲이승권 (철종·어영대장) ▲이원희(고종·훈련대장)등 한말까지 맥이 이어진다.
율곡은 이원수와 우리역사상 현모양처의 대명사처럼 알려진 사임당 신씨 사이에서 1536년태어났다. 태어난곳이 외가인 강릉 오죽헌. 풍광명미한 자연속에서 어린시절을 보낸 율곡은 16살에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19살에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에 몰입하기도 하다가 얼마후 하산, 당시의 정통학문이던 유학에 정진했다고 한다.
22살에 성주목사 노경린의 딸과 결혼하고 이듬해 성주처가에서 강릉으로 가는 길에 온나라에 명성이 높던 추계를 안동도산으로 찾아가 만났다.그때 58세의 추계는 이 23살의 연소기예한 율곡의 면모에 큰 감명을 받고 장래를 촉망했다고 한다. 그해 문과에 응시, 「천도책」이란 유명한 논문으로 장원급제했으며 이를전후 아홉차례나 과거에 모두 장원, 「아홉번장원(구도장원공)」이란 별명까지 얻었다고 한다.
벼슬에 나가 양관대제학을 비롯, 6조의 판서를 두루 역임하면서 그무렵 고개를 들기 시작한 동·서당쟁을 중간에서 조정하기에 애썼고 다가오는 임신왜란의 국난을 예견, 「십만양병론」을 주장하는등 예언자적 활약을 했으나 그의 애타는 호소는 받아들여지지 않아 그가 돌아간지 8년뒤 임신왜란 7년전쟁의 참화가 겨레를 덮치고 말았다. 학문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퇴계의 이기호발설에 대해 이통기국설을 내세워 퇴계의 영남학파에 대비되는 기호학파가 형성됐다.
율곡이 다가오는 환난을 예고했으나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채 돌아간뒤 7년대난의 참화에서 겨레의 맥을 지킨이는 충무공 이순신이다. 율곡과 19촌 숙질간인 충무공은 항렬은 아저씨뻘로 높았지만 나이는 아홉살이 아래.
대대로 문관의 집안이었으나 젊은날 생각한바있어 읽던 글을 치우고 무예를 닦아 군인이 됐다. 31살때에 과거에 급제, 10이 넘도록 요즘으로 치면 위궁급의 말직으로만 돌았다.
공의 인품을 전해들은 율곡이 『한번 찾아오라』는 연락을 했으나 『일가인데 찾아다니면 공연한 말만 듣는다』고 거절했을만큼 시속과 영합하지않는 처신때문이었다. 당시 율곡은 정계의 중진으로 활약하던때. 두사람은 끝내 생시에 만나지 못했다.
벼슬에 나선지 25년만인 임신 한해전 1591년에야 지지인 유성룡의 추천으로 전나좌수사로 임명된것은 그에게 처음으로 벼슬다운 벼슬이자 겨레에게는 행운이었다.
1592년4월13일 풍신수길의 명령에 따라 15만의 왜구가 부산에 상륙, 유사이래 없였던 참혹한 전쟁이 시작됐다.
이후7년 전쟁을 마무리짓는 노량해전에서 패주, 왜군의 잔당을 섬멸할때까지 충무공의 공·사간 일거일동은 한점의 나무랄데가 없는것이었다.
장군에게 일패도지, 대륙침략의 허망을 버려야했던 왜인의 후손들조차 「역사상 가장 이상적인 군인」, 「가장 위대한 해군지휘관」으로 추앙할만큼 그의 자취는 거룩하다.
충무공함대가 남해의 제해권을 갖지 못했다면 임신왜란은 풍신수길의 야망대로 일제침략을 2백여년 앞당겨 실현했을 가능성이 높았다는것이 훗날 사가들의 객관적인 분석이다.
그밖에 택당 이식은 「4대가」의 한사람으로 꼽힌 한문학의 태두였고 그의 집안아저씨뻘인 이안눌 또한 이태백에 비견되던 일세의 시인.

<이완, 호난때 전사>
충무공 임종을 지켰던 조카 이완은 훗날 의주부윤으로 정묘호난에서 청군과 싸우다 전사,아산 현충사에 충무공과 함께 배향됐다.
현대의 덕수이씨는 이종남(서울지검검사장), 이종남(전국회의원), 이재단(성균관관장), 이일(미술평론가)등이 각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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