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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1면

「톨스토이」의 명작『부활』에는 라일락꽃이 여기저기 등장한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신선한 공기와 달빛과 개구리 소리가 밀려들어오는 밤인데, 그 창밖엔 라일락꽃이 함초롬히 피어 있었다.
러시아의 봄은 우리보다 한참 늦는 것 같다. 5월 하순쯤이나 되어야 라일락이 제철이다.
그 날은「예수」승천축일 (6월 초순) 이었다.『부활』의주인공「네플류도프」는 바로 이날 이 세상에 나서 처음으로『포도알 같은 눈을 반짝이는 소녀』와 입맞춤이라는 것을 해보았다.
이슬이 내리기 시작할 무렵 그는 몇이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도망가고 뒤좇고 하던 「네플류도프」와 한 소녀는 수풀 한 구석에서 그만 마주서게 된다. 어느 결에 둘은 입을 맞추었다.「네플류도프」는 그 때 19세의 대학 3학년생.
순간 얼굴이 붉어진 소녀는 라일락꽃이 피어 있는 쪽으로 달려가 꽃가지를 두개나 꺾었다. 그 하얀 꽃 뭉치로 소녀는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얼굴을 토닥토닥 두드리는 장면이 소설 속에선 사뭇 한편의 서정시처럼 묘사되어 있다. 그 소녀는 바로「카튜샤」였다.
「톨스토이」는 70이 넘어 이 소설을 썼다. 노 작가의 어디에 그런 낭만이 숨어 있었는지 그 또한 감동적이다.
라일락의 꽃말은 겸손, 온순, 초연의 정서.
요즘 한껏 부푼 라일락꽃을 보면『부활』의 그 한 장면이 절로 떠오른다. 신록속의 흰 라일락은 흡사 소녀가 면사포를 두르고 있는 모습과도 같다.
라일락의 우리말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수수 꽃다리. 그 화사한 색깔과 화려한 향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수수꽃 모양의 수수한 이름이다. 그러나 중국 사람들은 정 향이라고 했다. 외로운 향기라는 뜻. 그래도「향」자를 빼놓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라일락의 속명「시링가」(syringa)는 그리스어로 피리(적)라는 뜻. 아마 그리스 사람들은 라일락 가지(지)로 피리를 만들었던가보다.
라일락꽃은 역시 화가들의 마음에 들어「마네」,「모네닉」,「르느와르」등이 즐겨 그렸다. 모두 인상파 화가들인 것이 인상파이다.
남유럽에서 북국에 이르기까지 그 분포지 는 넓다.
차갑고 건조한 땀을 가리지 않는 생리 때문이리라. 종류만 해도 30여종. 물론 우리나라에도 야생 종 라일락이 있을 정도다.
동양에 호하기로는 페르시안 라일락 .실크 로드를 타고 전해진 종류 문득 라일락이 없었으면 봄은 한결 적막했을 것도 같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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