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한일회담>(201)양국 대표단 대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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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제6차 한일회담은 61년 10월20일 하오3시 도오꾜의 일본외무성 4층 회의실에서 열렸다.
한국의 배의환수석대표와 일본의「스기·미찌스께」(삼도조)수석대표가 번갈아 가며 대표단을 소개하는 동안 양측 대표들은 시종 표정없는 얼굴로 앉아있었다. 회의장은 냉냉하기까지는 않더라도 서먹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사진기자들이 늘상 하는대로 양국 수석대표에게 웃는 표정을 지어달라고 요청해서야 두사람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악수를 교환했다.
수석대표 임명을 둘러싸고 양국이 한차례의 신경전을 치른 여파랄까. 아니면 일찌기 이런 큰 회담을 이끌어본 일도 없고 정치적인 제스처나 외교적으로 세련된 매너를 익힌적도 없는 경제인 출신의 두수석대표의 성격때문일까.
회담은 시종 가라앉은 분의기속에서 진행되었다. 굳이 회담의 전도를 희망적으로 얘기할수 있다면 양국 수석대표의 인사말이 과거보다 다소 전향적자세를 보인 점이였다.
『한일양국은 극동의 두 자유진영국가로서 공산주의 위협에 처해 상호 긴밀한 유대를 이루어야할 처지다. (중약)한일간의 여러 현안을 조속한 시일안에 원만하게 해결함으로써 양국간에 남아있는 과거의 불신을 모두 해소하고 새로운 관계가 전개되기를 기대한다』
이상과 같은 배수석대표의 인사는 군사정부답게 한일관계의「안보적 차원에서의 정립」을 강조한 것이였다.
이에대해 「스기」수석대표는 『쌍방이 충분한 성의와 열의로서 복잡 미묘한 현안들을 신속히 해결하고 양국의 역사를 친구관계로 만들어 나가자』고 인사했다.
「충분한 성의와 열의로서 현안을 신속히 해결하고 싶다」는 대목은 그래도 과거에 비해 일본정부의 현안타결 의지를 한단계 높게 반영한 것이었다.
첫날 회담은 2차 본회담을 26일 재개하고 실무절충과 동시에 수석대표간의 정치적 절충을 병행하며 각 분과위 구성은 2차본회의에서 결정키로 하고 20여분만에 끝났다.
제6차 한일회담의 우리측 진용은 배의환수석대표를 비롯, 이동환주일공사, 이한기고문, 김윤근(변호사), 이천상(변호사), 김재원(국립박물관장), 고범준(한은부총재), 이홍직(고대교수), 황시영(동국대교수), 지근(수단중앙회고문), 홍승옹(산은이사), 이상덕(한은삼사) , 정태섭(변호사), 정일영(외무장관자문위원), 최영택(주일대표부참사관), 전상진(외무부정무국장), 이규성(외무부통상국장), 박동섭(재무부이재국장), 동명년(농림부수산국장), 윤기선(교통부해운국장), 문철정(주일대표부참사관), 문인귀(서울지검검사)씨등 22명이었다. 이들외에도 김정렴씨등 수명의 전문위원이 더 참여해 모두 30명이 넘는 대규모 대표단이었다.
이같은 대규모 대표단의 파일은 혁명정부가 한日회담에 기울이고 있는 열의를 반영한 것이라고 보아도 좋았다. 먼저 정치적 타결을 모색하고 그쪽에서 돌파구가 열릴 경우 이를 막바로 실무회담으로 연결시켜 회담을 속전속결로 이끈다는 군사정부의 의지를 뒷받침하기 위한 매머드 실무대표단이었다. 그리고 그 돌파구를 열기위한 「정치적 타결」계획을 혁명정부는 따로 준비하고 있었다. 바로 다름 아닌 혁명핵심세력의 파일이였다.
회담이 재개된지 불과 나을만인 10월24일 5·l6의 실질적인 제2인자였던 김종비중앙정보부장이 홀연 도오꾜에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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