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과 멋, 그리고 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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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우리의 민속예능은 확트인 자연을 배경으로한 야외놀이로서 발전되어 왔기 때문에 다듬어지고 제약받는 옥내공간을 별로 담갑지 않게 생각했고 실제로 극장도 개화기 이후에나 겨우 세워졌다.
도시화에 따른 극장공간이 필요하게 되었고 따라서 1902년에 관립극장 협률사가 설립된것이었다.
협률사는 1908년 원각사로 명칭이 바뀌면서 민간주도의 국악전용극장이 된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
일제의 강점으로 원각사는 2년여만에 폐지되었고 일인영화관이 판치는 속에서 광무가 국악의 발판구실을 했지만 그것도 경영상으로 오래 지속할수는 없었다. 그로부터 창극을 주로하는 국악인들은 떠돌이가 되어 유랑인의 신세를 면치 못했다. 동양극장과 부민관이 생긴뒤로 이따금 화려한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전용극장은 가져보지 못했다. 이는 해방후에도 다를바 없었다. 민간인안수복씨가 이번에 개설한 국악 전용상설 파고다극장은 그래서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것이다.
보름마다 레퍼터리를 바꾸어가면서 연중무휴공연을 갖는다는 파고다극장이 개관프로에서 보여준것은 국창 김소희씨의 판소리 『춘향가』를 비롯해서 임부조의 무용, 조남희 등의 가야금병창, 박륜초등의 남도민요, 김영희자매의 설장구및 부포놀이, 그리고 조상등의 창극 『놀부전』 이었다.
당대의 명인 김소희의 창은 우리시대에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소리로서 짧으나마 판소리의 진수를 들려준 것이었고 임배조의 『한량무』는 멋이 뚝뚝 떨어지는 율동이었다.
한농선· 신영희·박윤초등의남도민요는 번과 한을 적절히 조화시켜주는 가락이었으며 『놀부전』 은 해학성을 지나칠이만큼 확대하여 웃음과함께 속됨마저 나타내주었다.
김소희제자들과 조상그룹으로 구성된 전속연예단은 국립창극단 못지않은 강팀으로서 기예에 있어서는 손색없는 것이였다. 다만 1시간반정도 걸리는 내용 이 좀 빈약하고 짜임새가 허술한데다 밤무대의 진행같은 유치하고 장황함이 격을 떨어뜨렸다.
전체적으로 격이 떨어지는것은 진행상의 속됨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고 원색의 칙칙한 내부치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왕 국악전용극장으로 만들바에야 무대구조와 조명·음향시설도 국악과 건축전문가들의 충분한 조언에따라 했었으면 좋을뻔 했다.
앞으로 레퍼터리 선정에 있어서도 전속단체의 한정된 기예만으로 좁힐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묻혀있는 것을 과감히 발굴 초청하고 속악뿐아니라 정악쪽으로도 확대해나가야 할 것이다. 국악을 대중화 한답시고 저질화시키면 국악과 극장이 함께 죽을 가능성도 없지 않은것이다.
그리고 공연장 명칭을 「김소희예술극장」이라 붙이면어떨까.
유민영<연극평론가·단국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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