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가 되기보다는 잘 사는 사람 되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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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우리 다 부자로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자란 무슨 뜻입니까. 재산은 인연에 의해 내게 맡겨진 것이지 내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이웃과 나눠 가지며 덕을 닦는 사람이 바로 부자요, 잘 사는 사람입니다."

강원도 산중 거처에서 홀로 사는 법정(73.사진) 스님이 11일 오전 서울 성북2동 길상사 극락전에서 열린 창건 8주년 기념법회에서 한 해를 보내는 사부대중에게 '잘 산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 설법했다.

'부자되세요'가 국민 구호처럼 합창 되는 시대에 '과연 부자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졌다.

"연말이 되니 잘 산 한 해인지 잘못 산 한 해인지 되돌아보게 되더라"며 법문을 시작한 스님은 "세월은 가는 것도 오는 것도 아니다. 사람과 사물, 현상이 그 세월 속에서 오고 갈 뿐이다. 해가 바뀌면 어린 사람은 한 살이 늘지만 나이 든 사람은 한 살이 줄어든다. 되찾을 수 없는 게 세월이니 시시한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순간순간을 후회 없이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스님은 이어 "언젠가 택시를 타고 길상사로 가자니까 기사가 '아, 그 부자절요'그러기에 '부자절'을 한동안 화두처럼 생각했다"고 소개하며 '부자,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설법을 이어 갔다.

"탐욕이 생사윤회의 근원이요, 탐욕은 끝이 없다. 많이 가지면 그만큼 행복한가"라고 반문한 스님은 "행복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라 마음에서 향기처럼 우러나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음을 맑게 하고 주위를 둘러보는 향기로운 삶이 행복이요 잘 사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갑작스러운 부(富)를 경계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면 다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날부터 불행해지는 수가 많습니다. 가까운 사람들과 단절되고 열심히 살아온 의미를 잃습니다. 아마 잠도 제대로 못 잘 것입니다. 횡재를 만나면 횡액을 당한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돈은 혼자 오지 않고 어두운 그림자를 데려옵니다."

스님은 이처럼 돈이 오히려 불행을 불러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맑은 가난'의 실천을 당부했다. 물질적 가난이 미덕은 아니지만 더불어 산다는 뜻의 '맑은 가난'은 필요하다며 사람이 살다가 세상을 떠나면 무엇이 남는가를 물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재산도 지식도 자식마저도 내 것이 아닙니다. 평소에 지은 업(業)만 그림자처럼 따라갑니다. 오늘의 순간순간이 업이 돼 다음의 나를 만든다고 합니다."

스님은 "부자가 되기보다는 먼저 잘 사는 사람이 돼라"며 법문을 마쳤다. 길상사는 과거 최고급 요정이었던 대원각터 7000여 평에 세워진 절로 월북시인 백석의 연인 고 김영한씨가 법정 스님에게 시주했었다.

이헌익 문화담당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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